108화 : 3장 지인은 상봉하고, 격변의 바람은 불어온다 (2)
“이곳은?”
용무성과 철기당 무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개가 걷힌 절곡 안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폭포가 장관을 이루며 떨어지고 있었고 십여 개의 대소 전각이 그림처럼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온갖 기화이초가 피어 있는 그림 같은 풍경엔 세월의 고즈넉함마저 담겨 있어 과연 이곳이 인세의 풍경일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림 같은 광경을 보며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었지만 왠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절곡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용무성과 철기당 무인들이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용무성이 철기당 무인들에게 주의를 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하거라·”
“옛!”
철기당 무인들은 무기를 꺼내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진무원은 왠지 이곳에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처음 오는 장소 낯선 풍경인데도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도대체····’
진무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전각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진무원은 그중 가장 많은 인기척이 느껴지는 전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각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그러나 진무원을 비롯한 누구 한 명 어둠에 영향 받는 사람은 없었다·
“크흐!”
순간 어둠 속에서 기이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진무원은 경계하며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무원은 거침없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방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광인?’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 남자는 광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옥계에서 본 광인들과 달리 무작정 달려들지는 않았다· 아직은 광증이 완전히 발작한 것 같지 않았다·
진무원은 광인을 뒤로하고 다른 방들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그러자 처음 본 광인과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도대체 무슨 도깨비놀음이야·”
진무원의 뒤를 따르던 용무성이 중얼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철기당 무인들도 그와 같은 심경이었다·
감시하는 자 한 명 없이 전각 안에는 광인들만이 가득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이 광인들이 덤벼들지 않아 굳이 살상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 광인들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만일 광인들이 덤벼들었다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살인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진무원은 전방위 감각을 끌어올린 채 수색을 계속했다· 가장 큰 전각을 샅샅이 뒤진 후 두 번째 전각으로 그리고 또 다음 전각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보니 용무성 일행과는 자연스럽게 떨어져 따로 전각을 뒤지게 되었다·
진무원이 가장 작은 전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전각 중 가장 초라하면서도 구석에 있는 전각이다·
전각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달리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진무원은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점점 빨라졌다·
그가 복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한가운데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카락과 목을 덮은 수염 때문에 이목구비를 구별할 수는 없었지만 진무원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황숙!”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두근거렸다·
남루한 의복은 북천문에서 헤어질 때 그대로였고 앙상해진 팔목과 발목에는 은색의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예전에 비할 수 없이 추레한 모습이었지만 진무원은 그가 황철임을 확신했다·
진무원의 목소리에 황철이 중얼거렸다·
“허! 또다시 환청이 들리는 것을 보니 이젠 나도 미쳐가는 모양이구나·”
“황숙!”
진무원이 다시 한 번 황철을 불렀다· 그제야 황철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서 설··· 마?”
“저 무원입니다 황숙·”
“정말 공자님이십니까?”
황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의 눈에 절로 물기가 차올랐다·
진무원이 황철을 뜨겁게 껴안았다·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황철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이 환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공자님께서 어떻게 이곳에···?”
“당연히 황숙을 찾아왔지요·”
진무원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다행히 황철은 다른 광인들과 달리 광증이 발작한 것 같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진무원이 설화를 꺼내 황철을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잘랐다· 그제야 자유를 찾은 황철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내공을 끌어올려도 꿈쩍도 하지 않던 쇠사슬이 이렇게 쉽게 잘릴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공자님을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황숙이 실종되었는데 제가 어찌 가만있겠습니까?”
“공자님·”
황철이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진무원이 그런 황철의 눈가를 훔쳐 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황숙? 모두들 광인이 되었는데 오직 황숙만 멀쩡하니·”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삼원심법 덕분 같은데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황숙이 고개를 내저었다·
적귀병단에 의해 이곳으로 이송된 것이 다섯 달 전이다· 처음엔 그 역시 백룡상단의 보표들과 같이 갇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한두 명씩 미치기 시작했다·
그와 가장 친하던 보표들이 미쳐서 발작하는 광경은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였다· 다음 날 누가 미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른 이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삼원심법에 미친 듯이 매달린 것이·”
다행히 내공에 금제를 가하지 않은 덕에 내력을 운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황철은 정말 전심전력으로 삼원심법에만 몰두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도 황철이 미치지 않자 그들 역시 의아함을 느낀 듯 이렇게 일부러 격리시킨 후 쇠사슬로 구속했다·
‘삼원심법은 항마력을 가진 현문정종의 심법· 현문의 내공이 황숙을 보호한 모양이구나·’
진무원 역시 삼원심법을 익힌 것이 아니었기에 그렇게만 짐작할 뿐이었다·
진무원은 황철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예전보다 더욱 깊고 그윽해진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분명 황철을 막고 있던 어떤 벽을 넘은 것이 분명했다·
“다행입니다·”
진무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공자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예?”
“공자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황철이 전각 뒤쪽을 향해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진무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황철이 안내한 곳은 후원이었다· 그곳은 다른 곳과 달리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아 무척이나 황량해 보였다·
“이곳엔 왜?”
“공자님 여깁니다·”
갑자기 황철이 바닥 한곳을 가리키더니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후 바닥에 묻혀 있던 검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상자에서는 섬뜩한 정도의 음산한 기운과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이곳에 이것을 묻은 후 사람들이 하나둘씩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황철이 진저리를 치며 상자에서 떨어졌다·
진무원은 내력을 운용해 심맥을 보호한 후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강렬한 독기가 진무원을 덮쳐왔다· 만영결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는데도 어지럼증이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독기였다·
“이건?”
상자 안에 있는 것은 회색의 단환이었다· 단환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가공할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독기에 노출되는 순간 단숨에 중독되어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것이 광증의 원인? 그럼 옥계에서 발작한 광인들도 다 이곳에서 독기에 노출되었던 것인가?’
진무원은 단환을 조금 떼어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의술이나 독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육안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진무원은 전각을 뒤져 사슴 가죽으로 된 조그만 주머니를 찾아냈다· 그는 단환 조각을 주머니에 넣은 후 잘 밀봉해 따로 보관했다·
황철을 구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금단엽은 왜 이것으로 광인을 양산했을까? 광인들이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은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도대체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진무원은 이곳의 모습이 금단엽이 그에게 전하고자 하는 전언(傳言)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곳의 모습을 통해 그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 황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이야기로만 듣던 밀야와 참으로 흡사합니다·”
“이곳이요?”
“그렇습니다· 처음 잡혀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소인이 어릴 적에 밀야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설명해 준 밀야의 본거지가 이런 식으로 묘사됐단 걸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진무원도 이곳이 그렇게 낯익은 것이었는지 이유를 알아냈다· 그 역시 어린 시절 황철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밀야의 축소판인 셈인가?’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데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진실에 한 걸음 더 나간 것은 확실했다·
그때였다·
“여기에 있었군·”
용무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무원과 황철이 뒤를 돌아보자 용무성과 철기당의 무인들이 웬 괴인을 포박해 다가오고 있었다·
“크으으!”
다른 광인들과 마찬가지로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이지를 잃은 남자의 모습에 황철이 경호성을 터뜨렸다·
“공자님!”
광인이 된 채 발작을 일으킨 이는 분명 백룡상단의 셋째공자인 윤자명이었다·
이곳에 잡혀온 이후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기에 황철도 윤자명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셋째공자가 맞는 모양이군· 다행이야· 비록 미치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용무성이 코끝을 찡그렸다·
윤자명을 찾은 것은 다행이지만 왠지 찜찜함을 금치 못하겠기 때문이다· 마치 볼일을 보고 뒤를 안 닦은 것 같이 더러운 기분이었다·
용무성이 진무원에게 말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나머지 사람들이야 따로 사람을 보내서 데려오고· 기분이 엿 같아서 더 이상 이곳에 있기가 힘들군·”
“그러시죠·”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이곳에 있는 것이 그리 개운한 기분이 아니었다·
진무원은 황철을 부축해 만절곡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봐 왜?”
용무성이 갑자기 멈춘 진무원의 모습에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야?”
언제 나타났는지 수많은 무인이 만절곡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삼십 대 후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새하얀 영웅건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고 하늘색 장삼을 입은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