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2장 목숨, 그 이상의 가치 (2)
진무원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 거대한 살기가 그의 육신을 발기발기 찢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누가?’
금단엽의 숨이 끊어진 순간 지하 공동을 덮기 시작한 거대한 기운은 그의 육신을 꼼짝도 할 수 없게 옥죄어오고 있었다·
지금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내력은 겨우 한 모금에 불과했다· 평상시의 몸 상태라면 모르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적의 한 초식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진무원이 힘겹게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시커먼 벽뿐이었다· 만일 그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냥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지레짐작했을 것이다·
진무원은 눈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안력을 집중시켰다· 그러자 어두운 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거대한 박쥐의 날개처럼 몸을 감싸고 있는 피풍의를 입고 있었는데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피풍의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펄럭이는 피풍의 사이로 언뜻 은색의 창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만큼 주름살도 깊고 선명했는데 이상하게 늙어 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주름살마다 드리운 음영이 그의 인상을 더욱 강인하게 만들고 있었다·
남자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남군위와 금단엽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언뜻 황금빛 안광이 맺혔다가 사라졌는데 그로 미뤄보아 매우 특별한 심공을 익혔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검은 피풍의와 황금빛 안광·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데·’
진무원은 분명 남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애써 마음의 동요를 감추며 만영결을 운용했다· 지금은 입을 열 때가 아니었다· 입을 열면 그나마 남아 있는 내력 한 모금마저 흩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력을 최대한 빨리 회복할 때였다·
다행히 남자는 진무원을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늦었구나· 단엽 꼭 이래야 했느냐?”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음성이다·
그가 금단엽의 시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단지 가볍게 걸음을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보보마다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진무원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절대··· 그 이상의 경지·’
등 뒤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피부에 소름이 올라오며 전신의 신경이 근질거렸다· 머릿속에서는 연신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한 것 같은 존재감이 지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자신이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천문을 나온 이후 이런 존재감을 가진 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전에는 혼마라는 괴물과 백야선자만이 이런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백야선자? 사대마장?’
순간 진무원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검은 날개가 펼쳐지면 신창이 빛을 발한다· 하나 그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죽음의 광휘·
밀야에게는 신창이라고 불리지만 북천문의 무인들에게는 귀창(鬼槍)이라 불리던 전설적인 존재·
‘검은 날개를 가진 신창··· 흑익신창(黑翼神槍)인가?’
진무원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가 정말 흑익신창이라면 최악의 상황에서 극악의 상대와 조우한 격이다· 더군다나 연이은 싸움으로 인해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만영결을 운용하면서 내력이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지만 이 정도로는 흑익신창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흑익신창이 금단엽의 시신을 품에 안았다·
“단엽 너는 언제나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아이였지· 모두가 너를 아끼게 하고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스스로의 죽음으로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려 하는구나·”
그의 음성엔 슬픔이 가득했다· 그는 진심으로 금단엽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고 그런 그의 감정은 공기를 타고 진무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진무원은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그의 슬픔에 담긴 가공할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흑익신창이 금단엽의 시신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진무원 북천문의 어린 호랑이여·”
그의 목소리에는 스산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나를 압니까?”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밀야의 숙적을·”
“역시 밀야는 건재했군요· 단지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
“그렇다· 이제 단엽의 죽음으로 밀야는 오랜 잠에서 깨어날 것이고 천하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흑익신창의 눈에 다시 황금빛 광망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진무원은 안구가 깨어질 것 같은 아픔을 느꼈지만 결코 피하지 않았다·
“단엽은 많은 사랑을 받는 아이였다· 이제 이 아이가 죽은 이상 그를 아끼던 이들이 그의 뜻을 잇기 위해 세상으로 나설 것이다·”
금단엽은 항상 외쳐왔다·
좁은 곳이 아닌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지만 의지를 잃은 밀야는 그의 외침을 외면했다· 결국 그는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스스로의 죽음으로 잠든 밀야를 일깨웠다·
“밀야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올 거란 말이군요?”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흑익신창이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금단엽은 저 어두운 천장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야명주 같은 존재였다· 이제 그 희미하던 빛마저 꺼졌으니 어둠 속에서 잠을 자던 이들이 빛을 찾아 밖으로 나올 것이다·
흑익신창의 말에 지하 공동 밖에 은신해 있던 청인이 몸을 떨었다·
“밀야가 다시 세상으로 나온단 말인가?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구나·”
청인은 밀야의 공포를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보를 다루는 직업의 특성상 밀야와 연관된 정보를 수없이 접했기에 그들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써 태연하려고 했지만 그의 몸에는 진한 떨림이 일고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공포를 인지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흑익신창이 나타면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의 옆에 있는 곽문정은 이미 동공이 풀려 있었다· 흑익신창의 가공할 존재감을 이기지 못한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의 자극에 대한 모든 연결을 끊은 것이다·
진무원의 입가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좀 전보다 내력이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흑익신창의 존재감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열세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물러설 곳도 물러설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참고 버티며 어떻게든 내력을 회복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끌기 위해 진무원이 질문을 던졌다·
“건재하다면서 밀야는 왜 이제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겁니까? 내분 때문이었던 겁니까?”
“내분?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은 네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진무원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금단엽도 그렇더니만 흑익신창 역시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부로 넘겨들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결코 허언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흑익신창의 황금빛 광망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에 진무원을 압박하는 기운도 더욱 거세졌다·
“크윽!”
진무원이 이를 악물며 설화를 움켜잡은 손에 힘을 줬다·
흑익신창이 그런 진무원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당장 네놈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겠다· 너는 꼭 살아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중원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모습을·”
우웅!
그의 말은 진무원에게 거의 예언처럼 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확고한 신념과 힘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진무원의 눈에 핏발이 서며 붉게 충혈됐다· 그 역시 한계에 달한 것이다· 심맥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금단엽과 적귀병단에게서 입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공은 고갈되었고 육체는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바닥을 드러낸 그림자 내공이 갑자기 크게 요동치더니 그의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겨우 엄지손톱만 하던 그림자 내공은 단전을 크게 휘돌더니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물먹은 솜처럼 진무원의 전신이 그림자 내공에 잠식되어 갔다·
한계에 달한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그림자 내공이 스스로 움직인 것이다· 그림자 내공은 외부의 기운을 암암리에 끌어오기 시작했다· 지하 공간에 가득 찬 것이 죽은 자들의 내력이다·
육체가 죽어 외부에 흩어지기 시작한 내력이 지하 공간에 가득 차 있었고 그중 일부를 그림자 내공이 끌어와 진무원의 육체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흑익신창은 그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그림자 내공의 무서운 점이었다· 절대의 고수라 할지라도 내력의 유동은 절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진무원은 내력이 무섭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설화도 힘을 얻은 듯 그의 손에서 칭얼대며 특유의 요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흑익신창이 진무원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녀석은····’
그는 보기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밀야와 북천문의 전쟁에 참여했고 두 문파의 흥망성쇠도 모조리 지켜봤다· 그렇기에 북천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 어디에도 이렇게 요기를 흩뿌리는 무공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요기에 반응해 신창이 반응하고 있었다·
우웅!
그의 신창이 상대의 기운에 반응해 먼저 울음을 터뜨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순간적으로 그의 살기가 증폭됐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금단엽을 죽인 자다·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 죽여 후환을 제거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제거할 수 있을 거라는 유혹이 그의 내면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내 단엽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의 살기를 감지한 듯 설화가 더욱 강한 요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엄청난 긴장감이 장내에 감돌기 시작했다·
청인은 그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아예 곽문정을 데리고 밖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호기심이 강한 그라도 더 이상은 견디기가 힘이 들었던 것이다·
청인과 곽문정이 사라진 뒤에도 두 사람의 대립은 계속됐다·
문득 흑익신창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 단엽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 이대로 고이 너를 보내주는 것도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구나·”
그가 손을 들자 어느새 거대한 은빛 장창이 들려 있다· 은빛 장창의 표면에는 혀를 길게 내민 귀신 문양과 함께 의미를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가 진무원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순간 그의 창에서 수십 줄기의 빛이 폭출되었다·
쉬이익!
진무원은 이를 악물며 설화를 휘둘렀다·
쿠콰가각!
지하 공동 안에 한줄기 폭풍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