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2장 목숨, 그 이상의 가치 (1)
“휴!”
당기문이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당미려가 그에게 하얀 수건을 건넸다·
“고맙구나·”
당기문은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았다·
그의 앞에는 광인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밤새 그는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광인의 시신을 살폈다· 수십 개의 은침과 각종 독물을 이용해 시신을 시험했다·
“광증의 원인은 찾아내셨나요?”
“아직 갈 길이 멀구나· 그래도 대략 범위는 좁혔으니 차근차근 시험해 나가면 윤곽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다행이네요·”
당미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나보다 네 얼굴이 초췌하구나·”
“아 아니에요·”
“말하거라· 무슨 일이냐?”
시신을 살피느라 당기문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기문의 추궁에 당미려는 어쩔 수 없이 간밤에 옥계에서 있었던 참극에 대해 말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당기문은 경악은 금치 못했다·
“정말 옥계에서 그런 싸움이 벌어졌단 말이냐?”
“예!”
“허어! 미쳤구나· 일반 백성이 대다수인 옥계 내에서 어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백성들의 희생이 엄청나겠구나·”
당기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얼굴엔 참담함만이 가득했다·
무공을 익힌 무인과 일반 백성이 혼재된 세상이 강호였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일반 백성의 삶에는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이 강호의 암묵적인 규율이다·
아무리 강호를 주름잡는 대방파라 할지라도 그런 강호의 율법을 어기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혀 견제를 받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정도를 표방하는 문파들은 될 수 있으면 사람이 많이 사는 곳에서의 충돌은 피하는 형편이었다· 그것은 운중천도 마찬가지였다·
패권회는 그런 강호의 규율을 공공연히 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정체불명의 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한 일이라지만 용인될 수 있는 한도를 한참이나 벗어났다·
“내 당가로 돌아가는 대로 반드시 이 일을 공론화시킬 것이다·”
“숙부님?”
“패권회주 조천우가 야망이 큰 자인 줄은 진즉 알았지만 이리 무도한 자인 줄은 정말 몰랐다· 이쯤에서 견제하지 않으면 분명 더 큰 사달을 내고 말 것이다·”
당미려는 당기문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당기문이 진짜 이 일을 공론화할 것이라는 것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당미려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 소협·’
그녀가 떠올린 사람은 바로 진무원이었다·
모두가 외면할 때 그녀와 숙부를 구해준 그 남자· 그는 다른 이들처럼 단지 입으로만 정의를 떠드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움직였다·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가해질 불이익을 감수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당미려는 이제까지 그런 남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무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밖에서 그들의 거처를 지키고 있는 송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곧 잦아들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방문이 열렸다·
“당 대협이십니까?”
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삼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새하얀 영웅건으로 머리를 단정히 묶고 하늘색 장포를 입고 있는 문사풍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가 당기문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등 뒤에는 패도로 무장한 십여 명의 무인이 도열해 있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당기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당기문일세· 그쪽은 뉘신가?”
그러자 문사풍의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운중천에서 파견된 담주인이라 합니다·”
“그럼 자네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운중천의 사자인가?”
“운중천 적무당(赤霧黨)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적무당?”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운중천 내에서도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조그만 조직이니까요·”
담주인이라는 이름도 적무당이라는 이름도 모두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담주인이 웃으며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당기문에게 넘겨주었다·
“총관부의 부주인 관대승 대협이 전하라 한 서신입니다·”
“관 대협이?”
총관부의 관대승은 그도 일면식이 있는 사람이다·
아홉 하늘이 항상 운중천에 상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운중천에 들어오고 대부분의 시간을 자파에서 보냈다·
총관부는 그런 아홉 하늘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운중천의 살림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조직이다· 관대승은 총관부의 수장으로 방대한 운중천의 살림을 꽤나 잘 이끌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담주인이 건네준 서신에는 신분을 보증한다는 말과 함께 관대승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관 대협의 보증이라면 믿을 수 있지·”
당기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담주인을 자세히 살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문사처럼 보인다· 특별한 무기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고강한 무공을 익힌 것처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거슬렸다· 확실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당기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그러나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없기에 당기문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함께 조사하면 되겠군· 광인의 시신은 확보되었으니 운중천이 조금만 더 도와주면 광증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 거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광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미 저희가 어느 정도 알아냈으니 당 대협께서 굳이 힘들게 조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담주인의 말에 당기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들은 지금 도착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언제···?”
“사실 저희는 이곳에 들어온 지 조금 되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당 대협께 사과드립니다·”
“미리 들어와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가?”
당기문의 언성이 절로 높아졌지만 담주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들의 관심을 돌릴 대상이 필요했습니다·”
순간 당기문과 당미려는 담주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눈만 끔뻑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낯빛이 변했다·
“그럼 우리가 미끼였단 말인가?”
“덕분에 적무당은 저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당 대협· 운중천은 당가의 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담주인은 웃었고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 ☆ ☆
진무원의 전신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지나온 자리에는 수많은 적귀병단 무인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헉헉!”
절로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걸음씩 옮기는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마치 누군가 그의 다리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느낌이다·
극도로 단련된 육체가 겨우 이 정도 움직였다고 피로를 호소할 리 없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극에 달한 것이다·
오늘 하루 수많은 이의 죽음을 경험했고 그중 상당수는 진무원의 손에 죽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들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이의 피를 설화에 묻혔다· 설화의 표면에는 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무게만큼은 태산이 되어 진무원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깊은 늪지에 빠진 것처럼 한 걸음 옮기는 것이 힘겹기만 했다· 그래도 진무원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금단엽이 있었다·
금단엽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퉁소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의 연주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젠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퉁소 음은 날카로워져서 진무원의 귓전을 파고들고 있었다·
만영결로 심맥과 고막을 보호하였지만 퉁소 음은 진무원의 내부를 흔들고 있었다· 금단엽의 퉁소 음은 오직 단 한 명 진무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집중된 음파는 대량 살상 때의 두 배 세 배 이상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집중된 음파에 벌써 전신이 해체되었을 것이다·
압박을 견디다 못한 진무원의 코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피부가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며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윽!”
천붕멸절음의 위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더구나 밀폐된 지하 공간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져 위력은 수 배 수십 배 증폭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진무원이었다·
‘더 늦기 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일단 결심을 굳히자 진무원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설화를 잡은 오른손을 치켜들며 반대쪽 손에 공력을 집중시켰다· 공력이 집중된 검지로 설화의 검신을 때렸다·
따앙! 따앙! 따―앙!
순간 강렬한 쇳소리가 금단엽의 퉁소 소리를 잠시나마 흔들어놓았다· 금단엽의 집중력이 깨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찰나의 빈틈이 진무원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진무원의 몸이 계류보를 펼치며 쭉 뻗어 나갔다· 그에 금단엽이 코웃음을 쳤다· 예상치 못한 쇳소리에 잠시 평정심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연주를 멈출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마지막 멸절음을 불기 위해 폐부에 숨을 가득 들이켰다·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오른 그 순간 그가 퉁소를 힘껏 불었다·
삐이이!
보통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고음파가 진무원을 향해 날아갔다· 그는 이번 한 수에 진무원의 목숨을 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순간 진무원이 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십여 장까지 뛰어오른 진무원의 몸이 회전하면서 금단엽을 향해 내리꽂혔다·
멸천마영검의 유성혼 단천해 폭우림 등의 초식이 연이어 펼쳐지면서 허공이 온통 검영(劍影)으로 뒤덮였다·
쉬가가각!
수십 수백 개의 검영이 쏟아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장엄하기까지 했다· 금단엽은 자신이 천붕멸절음을 불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그 장엄한 광경에 압도당했다·
‘이것이 북천문의 절기?’
퍼버버버버벅!
폭죽이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지하 공동에 연신 울려 퍼지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부서진 돌멩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입구 밖에서 지켜보던 청인과 곽문정은 급히 고개를 움츠리고 자신을 보호했다·
청인과 곽문정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먼지가 자욱해 실내의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형?”
곽문정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려 나왔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으며 장내의 풍경이 드러났다·
진무원과 금단엽 모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문득 금단엽이 물었다·
“북천문의 절기인가요?”
“멸천마영검이라고 합니다·”
“하하! 북천문은 모두의 눈을 속이고 이런 어마어마한 절학을 만들어냈군요· 정말 대단해요· 정말··· 크헉!”
갑자기 금단엽이 피를 토해냈다· 울컥 쏟아져 나온 핏속에 잘게 부서진 내장 조각들이 보였다· 뒤를 이어 그의 전신 곳곳에서 상처들이 쫙 벌어지더니 핏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진무원이라고 해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천붕멸절음에 뇌가 진탕되어 사물이 두세 개로 겹쳐 보이고 계속해서 욕지기가 올라왔다· 마치 거대한 망치로 얻어맞은 듯 힘을 쓸 수가 없었고 갈가리 해체되는 듯한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그래도 진무원은 금단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백 년이 넘는 전쟁을 치른 밀야의 후예였지만 왠지 밉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같이 잊혔다는 동질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금단엽이 피로 물든 얼굴을 겨우 들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망막에 비친 진무원의 얼굴은 왠지 슬퍼 보였다·
“나의 죽음을 슬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이미 원하는 것을 이뤘으니까요· 내가 뿌린 씨앗들은 밀야를 다시 깨어··· 나게 할 거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한 점의 후회도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후회 따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하하! 역시 당신은··· 애뇌산 만절곡··· 꼭 가보····”
금단엽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절명한 것이다·
진무원은 말없이 금단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였지만 이상하게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절박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무엇이 그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인 것인가? 그가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상은 무엇일까?
물어볼 것은 산더미처럼 많은데 그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당신은····”
진무원의 말이 딱 끊겼다·
갑자기 거대한 기파가 덮쳐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