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1장 전설(傳說)의 부활 (2)
캉!
청명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동하는 음파에 담긴 거친 살기가 공기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진무원과 남군위의 몸이 동시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 대지를 박차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카캉!
설화와 방천화극이 부딪치면서 살기 어린 쇳소리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이미 한 번 상대해 본 경험이 있기에 그들은 상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남군위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무공을 펼쳤다·
화룡진염극을 익힌 이래 이렇게 최선을 다해보긴 처음이다· 한 초식 한 초식에 심혈을 기울이고 혼신의 공력을 주입했다·
쿠우우!
방천화극이 용트림을 하듯 극기(戟氣)를 사방으로 발산했다· 흐트러진 실타래처럼 사방으로 나풀대던 극기는 이내 꼬이고 뭉쳐 뚜렷하게 방천화극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극강(戟罡)이었다·
“화룡진혼(火龍鎭魂)·”
진무원의 요혈을 향해 극강이 날아왔다· 진무원은 한 걸음 옆으로 움직이며 설화를 밀어내듯 쭉 뻗었다·
팅!
방천화극의 넓은 면을 설화의 검첨이 밀어내며 방향이 바뀌었다· 바뀐 방향에는 적귀병단과 설풍대의 무인이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쾅!
극강에 격중된 무인들의 시신이 벽력탄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육신이 해체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차력미기(借力彌氣)?’
남의 힘을 빌려 타인을 공격하는 수법이다· 이화접목하고도 비슷하지만 적은 힘으로 최대한의 위력을 끌어낸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더 상승의 공부라 할 수 있었다·
남군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력미기를 사용한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당한 당사자가 자신이기에 더할 수 없이 굴욕스러운 것이다·
“감히!”
남군위가 이를 뿌득 갈며 진무원을 몰아쳤다·
방천화극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섬뜩한 바람이 일어나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의 방천화극은 마치 이빨을 드러낸 곰 같았다·
거대한 덩치 때문에 얼핏 미련해 보이지만 실은 상대방이 피할 방위까지 미리 계산해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제까지 상대한 적들은 그런 남군위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첫 공격을 막으면 그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이격이 들어오고 이격마저 막아내면 광풍 같은 삼격이 연이어 들어온다· 일단 한번 말리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남군위의 승리 공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공격 방식은 진무원에게 통하지 않았다·
지금 진무원의 오감은 활짝 열려 있었다·
눈은 적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는 상대방의 들숨과 날숨을 파악한다· 피부로는 공기의 파동과 변화를 읽으며 그 모든 것을 단숨에 조합하여 상대방의 공격 방향을 미리 예측했다·
일련의 작업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진무원의 극도로 단련된 육체는 순간의 판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바늘 한 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절묘하게 아귀가 물려 돌아가는 공격의 수레바퀴와 그에 대응하는 움직임은 공방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흉험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감히 그 누구도 그들의 싸움에 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공격을 하면서 남군위가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누구냐?”
그의 물음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진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남군위를 쓰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상대의 호흡을 파악하고 움직임을 예측해 미리 봉쇄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의 검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따다다당!
방천화극과 설화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극강이 형성된 방천화극과 부딪쳤음에도 설화의 검신에는 미세한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격돌하고 있었다· 지하 공동 서쪽에서 시작된 그들의 싸움은 동쪽 끝으로 이어졌고 다시 북쪽으로 진행됐다· 그들이 다가오면 근처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서둘러 다른 곳으로 피했다· 그만큼 흉험한 싸움이었다·
“이야아!”
쾅!
방천화극이 바닥을 때리자 방원 일 장의 커다란 구덩이가 파이며 돌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하지만 그곳에 진무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군위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평범한 초식으로는 진무원을 절대 따라잡을 수도 어떤 피해를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무원의 계류보는 평범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붙잡을 수 없었다· 계곡을 굽이쳐 흐르는 물처럼 진무원의 보법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놈을 잡기 위해선 나 역시 도박을 해야 한다·’
남군위가 이를 악물었다·
설마 자신이 이렇게 전력을 다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도 인간이길 포기하마·’
쩡!
순간 그의 몸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짐승이 깨어났다·
엽평이 율경천과 함께 금단엽에게 다가갔다·
주위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싸움은 금단엽을 제압해야만 끝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금단엽은 그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와는 반대로 엽평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굳어 있었다·
엽평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네놈 혼자 이런 일을 저지를 리는 없을 터· 배후가 어디냐?”
“궁금한가요?”
“순순히 말하면 최대한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
“하하! 농담이 심하군요·”
금단엽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에 엽평이 살기를 피워 올렸다·
“네놈 하나 죽는다고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놈의 부모 형제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혈육까지 모두 찾아내 천참만륙 찢어죽일 테니까· 우리 패권회는 능히 그럴 만한 힘이 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주군 조천우도 능히 그럴 만한 심성을 가진 자라는 것도· 그렇지 않았다면 북천문을 배신하지도 않았을 테지요·”
금단엽의 말이 엽평의 역린을 건드렸다·
벌써 십 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북천문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북천사주가 북천문을 배신한 대가로 중원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단지 말하지 않을 뿐이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고 감수해야 할 업보였다· 하지만 타인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엽평이 율경천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율경천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검으로 금단엽을 겨눴다·
“네놈 결코 쉽게 죽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뼈에서 살점을 한 조각씩 도려내 주마·”
“재밌군요· 저 역시 당신들을 쉽게 죽일 생각이 없는데·”
“흥!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지 보겠다· 차핫!”
율경천과 엽평이 거의 동시에 금단엽을 향해 달려들었다·
율경천의 검이 머리를 노리는 순간 엽평이 금단엽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러나 금단엽은 재빠르게 옆으로 피하며 그들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품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밖으로 나온 그의 손에는 은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퉁소가 들려 있었다· 그는 퉁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에 율경천이 코웃음을 쳤다·
“가소롭구나· 그딴 퉁소로 무얼 하겠다고?”
그가 금단엽을 향해 살초를 풀어냈다· 하지만 금단엽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퉁소를 입으로 가져갔다·
구슬픈 운율이 퉁소에서 흘러나왔다· 심금을 울리는 듯한 음률에 율경천과 엽평은 가슴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큭! 음공(音功)?”
우웅!
제일 먼저 이명증이 찾아왔다·
사물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이고 몸의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고수였다· 그들은 곧 내공을 끌어올려 심맥을 보호했다· 그러자 시야와 균형 감각이 정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설마하니 상대가 음공을 익혔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상대는 단 한 소절을 부르는 것으로 심맥을 진탕시킬 수 있을 정도의 고수였다· 강호에서 쉽게 보기 힘든 상대였다·
금단엽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계속 퉁소를 불었다·
“크윽!”
비명 소리는 근처에 있던 무인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갑작스런 음공에 대비하지 못해 심맥에 타격을 입은 것이다· 설풍대의 무인들이 충격을 받고 연이어 쓰러지자 율경천이 눈을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놈! 멈추지 못하겠느냐?”
그의 검에 검기가 맺혔다·
음공의 무서움은 불특정 다수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공기를 통해 음파가 전해지기에 내공으로 심맥을 보호할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금단엽이 탄주를 하게 내버려 둔다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율경천은 단숨에 금단엽을 격살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쉬악!
그의 검이 매섭게 금단엽을 향해 날아갔다· 율경천은 금단엽이 퉁소로 자신의 공격을 막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후에 펼칠 초식을 다섯 가지나 미리 준비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투웅!
마치 무형의 막에 막히기라도 한 듯 그의 검이 금단엽 근처에서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크윽!”
쿵쿵!
그는 반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서너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바닥에는 족적이 깊이 파였고 입에서는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율경천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흔들렸다·
“무형··· 음막(無形音膜)인가?”
음률로 무형의 막을 만들어 자신을 보호하는 음공 최고의 경지이다· 일반 무인들이 펼치는 호신강기와 비슷하지만 제어가 힘든 음률로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훨씬 더 고난이도의 공부에 속했다·
예상치 못한 금단엽의 경지에 율경천뿐 아니라 엽평도 당황했다·
‘절대의 고수· 강호에 음공으로 이 경지에 오른 무인이 있다니 도대체 이 정도의 무인을 움직일 수 있는 단체가 어디냐?’
금단엽의 무위는 이미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상대는 그들의 주군인 조천우에게 도전할 만한 자격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순간 엽평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섬전처럼 떠올랐다·
“서 설마 밀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의 고수가 나올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십 년 전에 북천문에서 밀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정보가 떠올랐다· 그 후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에 유야무야 잊혔고 엽평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외면했는지도 몰랐다· 정말 밀야가 출현한 것이라면 북천사주의 정당성 자체가 크게 훼손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밀야밖에 없었다·
척추를 따라 소름이 올라왔다·
금단엽은 웃고 있었다· 고아한 문사처럼 단아하기만 한 미소가 왠지 더 무섭게 보였다·
“우릴 떠올리는 게 그렇게나 오래 걸릴 일이던가요? 역시 너무 오랫동안 잊혀 있던 모양이군요·”
“저 정말 밀야냐?”
최대한 냉정하려 했지만 엽평의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려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밀야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과 무게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더군다나 밀야와 상대하던 북천문에 잠시나마 몸을 담고 있던 엽평 같은 자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금단엽의 시선이 엽평을 향했다·
“이해합니다· 당신은 직접 밀야와 싸워본 세대가 아닐 테니까요·”
공포의 실체를 직접 대면하지 않은 자는 타인의 공포심을 비웃는다· 자신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공포는 희석되고 잊혀가게 마련이었다·
밀야 역시 그렇게 잊혀갔다· 어떤 이들에게 밀야는 아득한 과거의 이름뿐일 것이다·
금단엽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잊을 수 없게 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요·”
이곳은 그가 준비한 죽음의 연주장이었다·
그가 다시 퉁소를 입에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