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8장 검을 지배하는 자 (2)
그곳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나마 천장에 박힌 야명주가 흐릿한 빛을 흩뿌리지 않았다면 바로 앞에 있는 벽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속에 금단엽이 서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도 그의 시야를 가릴 수는 없었다· 그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어둠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으!”
그곳에서 기괴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음성은 벽에 부딪쳐 메아리치면서 더욱 크게 증폭되고 있었다·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며 몸을 돌릴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나 부복했다·
“주군!”
전신이 땀과 피로 범벅이 된 남자는 암시장의 윤문천이었다· 설풍대의 추격에 쫓기던 그가 금단엽 앞에 나타난 것이다·
“윤 당주·”
“주군 돌아왔습니다·”
“윤 당주가 고생이 많군요·”
“아닙니다 주군·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윤문천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이마가 깨지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금단엽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무한한 경외와 존경의 염이 담겨 있었다·
“그대들에겐 미안합니다· 나 개인의 의지 때문에 당신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주군의 결정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릅니다· 주군의 뜻이야말로 저희의 뜻입니다· 잠들어 있는 밀야를 깨울 분은 오직 주군밖에 없습니다· 그에 자그마한 밀알이라도 될 수 있는 걸로 저희는 충분히 만족합니다·”
“윤 당주·”
“지금은 남 단주님께서 저들을 막고 있지만 그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곧 패권회의 추적자들이 들이닥칠 겁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십시오·”
윤문천의 말에 금단엽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나는 피하지 않을 겁니다·”
“주군!”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벌이든 간에 밀야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이미 밀야는 움직일 동력과 명분을 잃었으니까요·”
밀야는 기력을 잃은 거인이었다· 금단엽은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 그분들도 주군의 뜻을 알면····”
“지금 밀야에는 큰 충격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백야선자를 비롯한 사대마장이 움직입니다· 그들이 움직이면 밀야 역시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될 겁니다·”
“주군!”
“그래서 나는 피할 수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것은 나의 몫· 그에 따른 위험부담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우웅!
언제부턴가 금단엽의 몸에서는 패도적인 기세가 절로 발산되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세는 벽에 부딪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윤 당주!”
“말씀하십시오 주군·”
“저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예?”
“아닙니다· 준비하십시오·”
“예 주군· 그럼····”
대답과 함께 윤문천이 물러났다·
금단엽의 시선이 아까 신음성이 흘러나오던 곳으로 향했다·
“진무원·”
단 한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남자이다·
자신의 천리영음에 유일하게 답한 무인· 평범하게 만났다면 분명 좋은 지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늦었다·
“난세를 부르리라·”
난세는 혼돈을 불러오고 혼돈은 잠들어 있는 모든 것을 깨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의 죽음과 충격이 필요했다·
“이곳이 확실한가?”
엽평이 백가장원(白家莊園)이라는 현판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백가장원은 중앙에 있던 고관대작이 은퇴한 이후 지은 장원으로 옥계에 알려져 있었다· 무림과 아무런 연관이 없기에 패권회의 관심에서 비껴나 있던 곳이기도 했다·
설풍대주 율경천이 대답했다·
“확실합니다· 그의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졌습니다·”
“뜻밖의 장소에 토끼 굴을 마련해 두었군·”
엽평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곳을 찾아내기 위해 그 난리를 쳤다· 그들과 패권회의 싸움에 휩쓸려 죽은 백성의 수만 수백이 넘었다· 나중에 막대한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운중천이 개입하기 전에 이 사태를 끝내야 하네· 자칫하다가는 주군에게 막대한 부담이 될 수도 있음이야·”
다행히 아직 운중천에서 파견한 무인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옥계에 상주하고 있었다면 이 미친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율경천이 엽평과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통주·”
“놈들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기대되는군·”
“후후! 어떤 준비를 했더라도 우리를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시작하게·”
“옛!”
대답과 함께 율경천이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설풍대와 무인들이 일제히 백가장원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와아아!”
그들의 함성 소리가 백가장원 안에 울려 퍼졌다· 백가장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인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백가장원 안에 쇳소리와 고함성이 메아리쳤다·
광기가 지배하는 살육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 ☆ ☆
임수광이 허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옥계의 처참한 모습에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이 사태의 주범이 패권회라고 생각하니 더욱 참담해졌다·
“부끄럽구나· 이 꼴을 보려고 회주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인가?”
임수광은 어떤 목적의식도 없이 터덜터덜 걸었다· 축 늘어진 어깨가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양손에 낀 은린살갑이 한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북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도 어둠은 사위를 지배하고 있고 악몽 같은 밤은 끝나지 않았다·
“문주님·”
지난 십 년 동안 거의 잊고 지내던 얼굴이 떠올랐다·
북벽(北壁)이라는 위대한 별호로 불리던 남자· 누구보다 강인했으며 정도가 아니면 걷지를 않던 그 남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때는 왜 그를 믿지 못했을까? 그가 밀야와 내통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를 외면했을까? 어리석구나 수광아· 임수광아 너는 정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었구나·”
조천우의 달콤함 말에 흔들린 자신의 귀를 후벼 파고 싶었다·
알면서도 외면했다· 알면서도 더 이상 북방에서 무거운 짐을 지기 싫었기에 북천사주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것은 결코 씻을 수 없는 원죄· 그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무거운 업보였다·
“아악!”
그 순간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수광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달려갔다·
중년의 무인이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의 어깨에 검을 찔러 넣은 채 후벼 파고 있다·
“막 대주 이게 무슨 짓인가?”
임수광의 노성에 중년의 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세모꼴 얼굴에 눈이 양옆으로 찢어진 쥐 상의 얼굴이 보였다·
철령대주 막굉·
이곳에 투입된 세 개의 조직 중 하나인 철령대를 이끄는 무인이 막굉이었다·
“임 장로님이시군요·”
“무슨 짓이냐고 물었네·”
“이 계집 또한 무인입니다· 우리 패권회를 위협하는 존재지요·”
“그렇다면 단숨에 숨을 끊을 것이지 그렇게 괴롭힐 게 무에 있는가?”
“그러면 안 됩니까?”
막굉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명백한 조소에 임수광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의 발언이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네····”
“임 장로님의 문제가 뭔지 압니까? 그건 바로 낄 곳 안 낄 곳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때문에 회주님께서도 임 장로님을 껄끄럽게 생각하시지요·”
“자네 말이 심하군·”
“심하긴요·”
막굉이 허리를 펴며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소녀가 새된 비명과 함께 목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 모습에 임수광이 분노로 몸을 떨었다·
“회주께서 왜 임 장로님을 이곳으로 보내신지 아십니까?”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그분께서도 임 장로님이 부담스러운 겁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부인은 했지만 임수광은 막굉의 말이 사실일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장로인 자신이 굳이 이곳에 당기문 등을 호위해 올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당기문의 호위를 부탁한 자는 다름 아닌 조천우였다·
막굉이 싱글싱글 웃으며 임수광을 향해 다가왔다· 막굉의 주위에는 어느새 철령대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임수광이 탄식을 토해냈다·
“회주가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었구나·”
“그래서 임 장로님이 더 부담스러우신 거죠· 이제 사실을 아셨으니 순순히 저세상으로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릉!
철령대의 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임수광이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토사구팽 당해도 할 말이 없구나· 하나 그냥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터·”
“쯧!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하시려나 보군요·”
막굉이 혀를 차며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철령대의 무인들이 일제히 임수광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무원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그의 뒤를 청인과 곽문정이 숨을 죽인 채 뒤따랐다· 특히 청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옥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도 충격적이었지만 진무원의 가공할 무위는 그에게 한줄기 공포심마저 심어주었다·
‘천하에 저런 검객이 존재했다니·’
흑월의 비월로 활동하면서 천하의 수많은 무인을 감시해 온 청인이지만 맹세코 진무원과 같은 무인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무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무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분위기와 기세는 상대가 채 덤벼들기도 전에 전의와 예봉을 꺾어놓았다· 덤볐다가는 영혼까지 베일 것 같은 섬뜩함이 상대를 진저리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에 천하의 청인마저 몸서리치며 진무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 진무원의 걸음이 멈췄다·
청인의 눈이 절로 진무원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혈인이 벽에 기댄 채 겨우 숨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무원이 혈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혈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자··· 네군·”
“임 대협·”
혈인은 바로 임수광이었다· 그가 치명상을 입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철령대의 무인 십여 명이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막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자네의 이··· 름이 진무원 맞는가?”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가 아는 그 진무원인가?”
임수광의 질문에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임수광의 질문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그가 아니었다·
임수광은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문턱을 넘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임수광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절박한 눈으로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그는 진무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의 일념이 진무원에게 전해졌다·
진무원이 탁한 음성을 토해냈다·
“맞습니다· 어린 시절 임 대협이 저에게 심심파적으로 무공의 기초를 알려주곤 했지요·”
순간 임수광이 몸을 떨었다·
“아아!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네· 그리고···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나는··· 천고의 죄인 죽어서도 진 문주에게 사죄를 하겠네·”
임수광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에 진무원이 귀를 그의 입에 바싹 갖다 댔다·
“부탁··· 일세· 제발 회주의 폭주를 막아주게· 제발 이 지옥 같은 밤을 끝내··· 오직 자··· 네만이 그럴 자격····”
임수광의 말이 끊어졌다· 절명한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눈을 편히 감지 못했다·
진무원이 손을 뻗어 임수광의 눈을 감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