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7장 하늘을 꿈꾸는 자에겐 피도 눈물도 사치다 (3)
대부분의 절은 산중 깊은 곳에 있거나 민가와 멀리 떨어진 곳에 터전을 잡는다· 아무래도 세속에서는 불법을 수행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룡사(九龍寺)는 특이하게도 옥계의 중심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일명 구룡석탑이라 불리는 십삼 층짜리 석탑이다·
구룡석탑 정상에 올라서면 옥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때문에 옥계를 찾는 유람객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었다·
평상시 참배객과 유람객으로 북적거렸을 구룡사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일단의 무인이 구룡사를 점거하고 있었다·
구룡석탑 위에서 옥계를 내려다보는 남자가 있다· 약간은 꾸부정한 허리에 왜소한 체구의 평범해 보이는 남자였다· 하지만 남자의 실체를 아는 자라면 감히 그를 평범하다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천안통주 엽평·
패권회주 조천우의 최측근인 그가 구룡석탑 정상에서 옥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옥계에서 일어난 소요가 가감 없이 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고요하던 거리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밤하늘의 정적을 찢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설풍대가 윤문천을 추적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설풍대는 무자비했다· 그들은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윤문천과 그를 구해간 자를 추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적들의 방해도 만만치 않았다·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들이 나타나 설풍대의 추적을 방해했다· 평범해 보이는 노파가 암기를 날리고 아녀자가 부엌칼로 검기를 발산하며 공격해 왔다·
예상치 못한 이들의 공격에 설풍대도 피해를 입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민간인인지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설풍대는 더욱 독하게 행동했다· 보이는 모든 이를 적으로 규정하고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그들의 행로에 있던 저택들이 파괴되고 곤히 잠을 자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옥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엽평은 구룡석탑 위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설풍대에 의해 죄 없는 이들이 죽어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감히 패권회의 영역에서 음모를 꾸민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운남성에 들어온 상단이 실종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는 패권회였다· 단순히 물질적인 손해만 봤으면 큰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가장 중요한 명성과 신뢰에 큰 금이 가고 말았다·
그로 인해 패권회가 입은 타격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중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바로 운중천이 운남성의 사태에 개입할 빌미를 줬다는 것이다·
북천문을 배신하면서까지 얻어낸 그들의 영토이다· 비록 필요에 의해 운중천과 손을 잡았다고 하지만 끝까지 함께할 수 없는 사이란 것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천우는 이제까지 운중천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일련의 사태로 그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운남성에 들어온 세 번째 상단이 실종된 직후 조천우는 엽평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반드시 놈들을 추적해서 색출해 내게· 운중천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해야 하네·’
얼마나 많은 이가 죽어나가고 피해를 입을지는 애초에 조천우의 염두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운중천이 파견한 이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엽평은 은밀히 움직였다·
하지만 숨어 있는 적들을 추적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어찌나 은밀히 숨었는지 그들의 흔적조차 발견하기 힘들었다·
저들이 옥계를 근거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게 알아냈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결국 엽평의 결론은 한 가지로 귀결됐다·
“옥계에는 분명 많은 협조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본 회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수가 있는지는 엽평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몇 명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수백 명이 넘을지도 몰랐다·
그로 인한 절대자의 분노는 무서웠다·
조천우는 엽평에게 명했다· 옥계를 지도에서 지워서라도 암중의 인물들과 그들에게 협조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엽평은 진무원이 그런 것처럼 최근 암시장이 열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암시장을 통해서 실종된 상단의 물건이 풀릴 거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모든 것을 확인했으니 이젠 사냥할 일만 남았다· 감히 패권회의 아성에 도전한 자들을 응징할 시간이었다·
엽평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보였다· 그간 패권회에서 구룡사로 은밀히 빼돌린 주력 무인들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심지어는 소회주인 조운경조차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시작하도록·”
“명!”
힘찬 대답과 함께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들이 수하들을 이끌고 옥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엽평은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주군께서 원하는 대로 될 겁니다·”
옥계에 피비가 내릴 것이다·
☆ ☆ ☆
임수광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은색의 장갑을 손질하고 있었다· 미세한 굵기의 쇠사슬을 수도 없이 연결해서 만든 그만의 독문병기인 은린살갑(銀鱗殺匣)이었다·
백련묵강(百鍊墨鋼)으로 만들어 강도가 그 어떤 명검이기에 뒤지지 않을뿐더러 그의 장법을 배가시켜 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은린살갑을 끼면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회주인 조천우를 제외하면 패권회 내에서도 그를 상대할 자가 많지 않았다· 그 자신감의 이면에 바로 은린살갑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은린살갑을 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은린살갑을 끼지 않고도 그를 당할 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가장 편할 때가 은린살갑을 손질할 때였다· 병기와의 교감을 통해 정신의 안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휴! 마음이 쉽게 안정이 되지 않는구나·”
이곳 옥계에 들어서면서부터 일어난 현상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진무원과 동행한 후 일어난 일이었다·
“진무원·”
그의 마음에 심마를 던진 이름 석 자이다·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한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마음에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분명 죽었다· 운중천에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괜스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임수광이 진무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젊은 청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깊게 침잠된 눈과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유려한 얼굴선이 그가 알고 있던 어린 시절의 진무원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소년이던 진무원의 얼굴 또한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답답했다·
“휴!”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거친 북방을 떠나 중원에 들어올 때는 마음이 이렇게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는 홀가분하다고 생각했다· 밀야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서 해방되어 웅지를 펼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한 것일까? 십 년이 지난 지금 그의 가슴엔 커다란 바윗덩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가 믿고 의지하던 주군 조천우는 운남성에 자리를 잡은 이후 변했다· 조천우는 권력을 추구했다· 그에게 강호의 정의나 의기 따윈 통하지 않았다· 오직 힘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임수광은 그런 조천우의 행동에 염증을 느꼈다· 조천우 역시 그런 임수광을 멀리하면서 한직으로 내몰았다·
따지고 보면 임수광이 당기문을 호위해 이곳에 온 것도 조천우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져 자유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천우가 당기문 숙질의 호위를 명령했을 때 그렇게 흔쾌히 응했는지 모른다·
임수광은 진무원의 시선을 떠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덤덤함 그 자체였다·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정말 그가 아닌가? 차라리 그였으면 좋겠구나·”
번뇌와 심마의 소용돌이가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머리가 극심하게 아파왔다·
임수광이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장로님·”
밖에서 그를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 있었다·
“누군가?”
“저 송경입니다·”
송경은 그와 함께 이곳으로 파견 온 패권회의 젊은 무인이다·
“무슨 일인가?”
“급히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에 임수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오니 송경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변고?”
임수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정체불명의 무인들이 추격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체불명의 무인들이라니?”
임수광이 알기에 옥계에는 특별한 세력이나 무파(武派)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 역시 패권회의 영역이었다· 다른 세력이 있다면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설마 그 광인과 연관된 것인가? 밖으로 나가보자·”
“예!”
두 사람이 급히 청월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으음!”
한줄기 침음성이 임수광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저잣거리는 부서지고 무너져 폐허가 되어 있고 거리 곳곳에는 시신이 널려 있었다·
시신의 몸통에는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아직도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대체 누가?”
임수광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은린살갑을 끼었다· 그의 살심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였다·
그가 급히 송경에게 말했다·
“너는 당 대협을 지키거라·”
“그럼 장로님께서는?”
“나는 흉수들을 추적할 것이다·”
“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지키거라·”
“알겠습니다·”
송경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임수광은 송경을 뒤로하고 경공을 펼쳤다· 그는 흉수의 흔적을 쫓았다·
처참한 거리의 풍경에 임수광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목불인견의 참상이 거리에 펼쳐져 있었다·
도살장이 따로 없었다· 수많은 이가 죽거나 다쳐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무기를 든 무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이었다·
“아앙! 엄마 일어나·”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어미를 애타게 부르는 아이의 울부짖음이 그의 고막을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가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저 멀리 거리를 질주하고 있는 검은 무복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그가 휘두른 검에 다른 무인이 쓰러졌다·
“멈춰라·”
임수광이 노성을 내뱉으며 검은 무복의 무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검은 무복의 무인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임수광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임수광이 어느새 검은 무복을 입은 무인의 지척까지 파고들었다· 그가 손바닥을 활짝 폈다·
은룡무영장(銀龍無影掌)·
그에게 팔비신장(八臂神將)이라는 별호를 얻게 해준 성명절기가 펼쳐졌다·
검은 무복의 무인은 검을 휘둘러 임수광의 은룡무영장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파캉!
검이 산산이 부서지며 복부를 강타당한 검은 무복의 무인이 뒤로 훌훌 날려가 바닥에 떨어졌다·
“네놈들의 정체가 무엇이냐?”
임수광이 버둥거리는 검은 무복 남자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크윽!”
입가에 피를 흘리는 검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임수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임 장로님·”
“네놈은 철령대(鐵靈隊) 장오가 아니더냐? 네놈이 왜 여기에····”
검은 무복의 남자는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장오라 불린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회주님의 명입니다·”
“회주가? 그럼 이 모든 일이 회주의 뜻이란 말이냐?”
“철령대뿐만 아니라 설풍대 광천대(狂天隊)까지 모조리 동원되었습니다·”
장오가 언급한 조직은 모두 조천우의 직속 조직이었다· 임수광도 몇몇 구성원만 알 뿐 그 실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너희가 왜 이곳에서 살육을 벌이는 것이냐?”
“적들의 꼬리를 찾았습니다· 그들을 섬멸하라는 회주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이 입을 피해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냐?”
“일벌백계를 내리라 하셨습니다· 두 번 다시 패권회를 도발할 수 없도록· 필요하다면 옥계의 모든 생명체를 죽여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미친!”
임수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천우의 패도적이면서 거친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임수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정말 몰랐다·
장오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말했다·
“물러나십시오 장로님· 장로님이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회가 명운을 걸고 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백성들까지 도살한단 말이냐?”
“모두가 회를 위한 일입니다·”
“놈! 닥치거라!”
임수광의 노호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에 장오의 얼굴이 더 핼쑥해졌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주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것이오? 이것이 정녕 당신의 뜻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