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7장 하늘을 꿈꾸는 자에겐 피도 눈물도 사치다 (1)
진무원과 곽문정은 아침 일찍 객잔을 빠져나왔다· 그들의 뒤를 청인이 따르고 있었다·
진무원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시장 전체를 둘러봤다· 비록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몇몇 상인은 나와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법 많은 물건을 좌판에 깔아놓고 있었는데 사는 사람이 거의 없어 울상을 하고 있었다·
광인의 등장으로 옥계의 경기가 크게 위축되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싶은 풍경이다· 그런데도 진무원은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진무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젠장! 흑월의 천자조 비월인 내가 어쩌다가····’
청인이 투덜거리며 진무원의 뒤를 따랐다·
감시하는 임무를 들통 난 것도 모자라 같이 동행하는 신세라니· 이 사실을 흑월에서 알게 된다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이게 다 저 요사한 검 때문이야· 저 검에 홀리지만 않았어도····’
청인의 시선이 진무원의 허리에 차여 있는 설화를 향했다· 지금도 설화에게 홀린 당시를 떠올리면 등줄기에 소름이 다 올라왔다· 설마 자신이 일개 검에 홀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문득 얼굴 한쪽이 가려웠다·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청인이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우리에 갇힌 원숭이라도 되냐?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그의 고함에 곽문정이 어깨를 움츠렸다·
“죄 죄송해요· 그냥 신기해서요·”
“뭐가?”
“그 얼굴 진짠가요?”
곽문정은 진심으로 신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청인의 얼굴은 어젯밤에 봤을 때와 또 달랐다· 어제는 어린 점소이의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오십 대 초중반의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 키는 한 자나 커지고 체격 또한 바람 든 돼지 오줌보처럼 빵빵하게 변해 있었다·
곽문정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얼굴은 역용을 할 수 있다 치더라도 어떻게 사람의 체격이 하룻밤 만에 저리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청인이 코웃음을 쳤다·
“흥!”
순식간에 청인의 얼굴이 또 바뀌었다· 이번엔 삼십 대 후반의 날카로운 인상의 장년인의 얼굴이다·
“헉!”
“나도 가끔은 내 진짜 얼굴이 생각나지 않거든· 그러니까 함부로 추측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곽문정은 너무나 놀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큰 눈만 끔뻑거렸다·
괜히 그의 별호가 십보십변(十步十變)이 아니었다· 곽문정의 수준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진면목을 알아낼 수 없었다·
‘문제는 저 인간인데····’
청인의 시선이 옆에서 걷고 있는 진무원을 향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진무원은 청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바로 알아보았다· 문제는 그가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젠장! 아주 확실히 호구 잡혔구나· 감시하러 왔다가 이게 무슨 꼬라지야·’
진무원은 청인이 곁에 있음에도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청인을 더 열 받게 했다·
“흥! 흥!”
그가 연신 콧방귀를 뀌었다·
청인도 무공에 꽤나 자신 있는 편인데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을 잃었다· 더 열 받는 것은 진무원이 검을 뽑지도 않고 맨손으로 상대했다는 것이다·
청인의 눈빛이 침중해졌다·
‘매 지부장의 추측대로 그는 결코 평범한 무인이 아니다· 현재 젊은 무인 중에서 그와 대적할 수 있는 무인이 얼마나 될까? 칠소천을 제외하면 거의 없을 것이다·’
진무원의 모든 것은 흑막에 가려져 있었다· 출신 성분 익힌 무공 그리고 목적까지도 말이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뜬금없는 존재가 바로 진무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흑월이 진무원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부터 흑월은 총력을 기울여 진무원의 모든 것을 조사할 것이다· 진무원의 행적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출생지와 가족 사문 성격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까지 모조리 알아낼 것이다· 그것이 흑월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진무원이 피식 웃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자신을 의식하는 청인의 모습이 왠지 우스웠기 때문이다·
문득 청인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아침부터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냐?”
청인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부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라곤 시장과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진무원은 노점이나 좌판에 펼쳐진 물건들을 살펴보기만 할 뿐 정작 사지는 않았다· 처음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계속 지켜보니 아예 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곽문정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는 진무원은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리고 식전부터 이렇게 시장에 나올 만큼 급하게 필요한 물건도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진무원은 이유 없이 일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움직일 때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문득 진무원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시장 구석에 있는 노점이었다· 늙은 상인이 물건을 좌판에 가득 깔아놓은 채 팔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어 보였다· 종류도 다양하고 중원에서만 볼 수 있는 물건도 몇 가지 보였다·
진무원은 신중한 표정으로 좌판에 쌓인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노점 주인이 반색을 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있수?”
“이게 마음에 드는군요·”
진무원이 집어 든 것은 고풍스러운 문양이 음각된 철검이었다· 이런 시장 노점에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진무원은 철검을 검집에서 뽑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고급스러운 외양과 달리 누군가 이미 사용했는지 날이 군데군데 빠져 있었다· 그래도 수리만 하면 꽤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괜찮았다·
노점 주인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었다·
“흐흐! 기가 막힌 물건을 골랐구려· 은자 석 냥만 주시오·”
“비싸군요·”
“비싸긴 사기 싫으면 딴 데 가시오·”
“그러죠·”
진무원이 철검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오히려 노점 주인이 당황했다·
“이보슈 그냥 가시면 어떡하오?”
“비싸면 가라면서요?”
“제길! 은자 두 냥· 그 이상은 못 깎아주오·”
“제 질문에 답해주면 그냥 은자 석 냥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요?”
노점 주인이 솔깃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 검 어디서 났습니까?”
“그게 중요한 일이오?”
“그냥 궁금해서 그럽니다·”
“그게····”
웬일인지 노점 주인이 대답하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자 진무원이 품에서 은화를 꺼냈다·
“대답을 하면 은자 석 냥을 더 주겠습니다·”
은자 여섯 냥이면 본래 상인이 팔려던 가격의 두 배다· 청인과 곽문정은 진무원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진무원의 손에 들린 은화를 바라보던 상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암시장이 열리면서 많은 물건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소· 그 철검도 암시장에서 사온 거요·”
“암시장?”
“가끔씩 열리는데 요즘 들어 질 좋은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소· 여기 옥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중 반 이상이 암시장에서 물건을 사온다고 보면 될 거요·”
“암시장이 언제 열리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장담할 수 없소· 오늘 밤이 될 수도 있고 몇 달 후가 될 수도 있소·”
“그럼 열리는 장소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진무원이 노점 주인의 눈앞에서 은화를 흔들었다· 그러자 노점 주인의 얼굴에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현무로(玄武路)라는 길이 나오는데 그 한쪽에 큰 공터가 있소· 그곳에서 암시장이 열리오·”
“고맙습니다·”
진무원은 노점상 주인에게 은화 여섯 냥을 던져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예의 철검이 들려 있었다·
“형 그런 철검을 무슨 은자 여섯 냥이나 주고 사요?”
곽문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으로 물었다· 그에 반해 청인은 무언가 눈치챈 것처럼 신중한 표정으로 진무원의 손에 들린 철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그 검···?”
“운남에서는 보기 힘든 양식입니다·”
무기도 지역과 기후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운남처럼 숲이 빽빽한 지역에서는 검보다는 도를 선호했다· 특히 도신의 등이 두껍고 무거운 도가 환영을 받았다· 그래야만 우거진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검도 마찬가지였다· 운남의 대표적인 문파인 점창파의 주 무기는 검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검은 중원에서 사용하는 검보다 더 무거우면서 무게중심도 검첨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검의 본래 용도인 찌르기보다는 베기에 더 적합했다·
진무원이 들고 있는 검은 그런 운남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청인이 진무원에게서 검을 넘겨받아 자세히 살폈다·
“확실히 운남에서 만들어진 검은 아니군· 운남의 검은 더 무거우면서도 길이가 짧지·”
“중원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것도 최소한 호남성 이북에서요·”
진무원은 뛰어난 장인이었다· 검을 손가락으로 튕겨보는 것만으로 재질까지 알 수 있었다·
각 성마다 쇠의 제련 방식이 달라 미세하게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차이를 알 수 없겠지만 진무원처럼 경지에 이른 장인이라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보니 이렇게 중원에서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대량으로 풀렸더군요· 외부의 상단이 운남에 들어오길 꺼리는 상황인데도 그 많은 물건이 풀린 것 자체가 이상하더군요·”
그것이 진무원이 느낀 위화감의 실체였다·
“기가 막히는군·”
청인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분명 같은 광경을 보고 같은 거리를 거닐었는데 진무원은 자신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곽문정만이 두 눈을 끔뻑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도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안 되나요?”
곽문정의 볼멘소리에 청인이 혀를 찼다·
“그 머리는 장식품이냐? 머리를 굴려봐라· 운남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시장에 대량으로 풀렸다· 그게 무엇을 뜻하겠느냐?”
“어디선가 물건이 유입됐겠죠?”
“그러니까 어디서 유입됐겠느냔 말이다· 멍청아 생각 좀 하고 살아라·”
“그럼?”
곽문정의 표정이 굳었다· 그제야 그도 감을 잡은 것이다·
“그래 상인들을 납치해 간 자들이 암시장에 물건을 푼 것이다· 이 검은 납치된 상단의 무인들이 사용하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껏 수많은 상단이 납치당했다· 수많은 이가 그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이제껏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다·
흑월에서도 최근에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했지만 벽에 막혀 진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예상 밖의 인물에게서 사건을 진전시킬 단초를 얻게 되었다·
청인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이자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직관력까지 갖췄다·’
대부분의 사람이 단순히 실종된 상인들에게 집중할 때 진무원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추적했다· 그리고 의외의 장소에서 단서를 얻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능력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직관력은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보다 진무원이 훨씬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부르르!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이런 느낌이 꽤나 오래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무원이 청인을 바라봤다· 청인은 진무원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이제부터는 내가 맡지· 한 시진 안에 암시장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오지·”
꽉 막힌 상황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 어렵지 일단 단서를 얻은 이상 정보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흑월의 조직력을 이용하면 말이다·
진무원의 시선이 북쪽 현무로를 향했다·
‘이제야 한 걸음 가까워졌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