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4장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3)
곤명의 밤은 고요했다· 불은 모두 꺼지고 사람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지난 여섯 달 동안 곤명은 늘 이랬다· 마치 활력이 사라진 도시 같았다·
진무원이 머물고 있는 태평객잔 역시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주방의 불은 꺼졌고 얼마 안 되는 손님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진무원과 곽문정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던지 곽문정은 금세 수마에 곯아떨어졌다· 불 꺼진 방 안에 그의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진무원도 누웠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진무원은 침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하루쯤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지장 받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이렇게 시간을 덧없이 보내는 것도 아까웠다·
그가 찬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 때였다·
따라랑!
어디선가 은은한 금음(琴音)이 들려왔다· 누군가 탄주를 하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금음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담겨 있었다·
처음엔 단순히 듣기 좋은 소리라고만 생각하던 진무원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마치 격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그의 가슴이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음률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진무원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무원은 급히 곽문정을 바라봤다· 하지만 곽문정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듯 여전히 편안한 표정으로 자고 있다·
‘나를 부르는 것인가?’
진무원이 설화를 집어 들었다·
미지의 존재는 진무원을 부르고 있었다· 오직 그만이 금음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무원은 부름에 피할 생각이 없었다·
진무원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밖으로 나오자 금음이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해일이 밀려오듯 금음이 격렬하게 울려 퍼졌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누구 한 명 창문을 열거나 불을 밝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말은 곧 그들에겐 금음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 진무원은 마치 망치로 가슴을 두들기는 듯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진무원은 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만영결을 운용해 심맥을 보호하자 진무원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가공할 음공(音功)· 천하에 누가 있어····’
아직 강호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의 음공의 대가가 있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검이나 도로 고수가 되는 것보다 음으로 고수가 되는 것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다· 단순히 음공이 다른 무공보다 수준이 높아서가 아니라 그만큼 익힌 사람이 희귀하기 때문이었다·
익힌 사람이 드물기에 전해지는 비전 또한 극히 적었고 그 결과 익힐 수 있는 음공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설령 운이 좋아 음공을 익힌다고 하더라도 상승지경으로 가는 길목이 너무나 좁았다· 그 때문에 무림사를 통틀어 봐도 음공으로 고수가 된 자의 수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마침내 진무원이 도착한 곳은 곤명 외곽의 조그만 호수였다· 호숫가에는 조그만 정자가 있었는데 그곳에 누군가 앉아 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유건을 쓰고 새하얀 장삼을 입은 남자였다· 날카로운 얼굴선만큼이나 선명한 검미 반쯤 감은 검은 눈동자는 신비로우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남자는 진무원이 도착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탄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따다당!
탄주가 절정에 달했는지 금음이 마치 노도처럼 호수에 울려 퍼졌다· 그에 표면에 파문이 일더니 곧 격렬한 물결이 호수 전체로 퍼져 나갔다·
따아앙!
그리고 마침내 남자의 연주가 끝나는 순간 파문도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유건을 쓴 남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리더니 얼굴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치 진무원이 이곳에 온 것이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역시 왔군요·”
“나를 불렀으니까요·”
그러자 남자가 금을 들고 일어났다· 은은한 달빛이 그의 장삼을 타고 흘렀다·
“당신은 나를 아는 것 같은데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하는군요·”
“이런 실례를 범했군요· 내 이름은 금단엽이라고 합니다 진 소협·”
자신을 금단엽이라 소개한 남자가 정자를 내려와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금단엽의 목소리는 무척 나지막하면서 조곤조곤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가 연주하는 금음만큼이나 선명하면서도 매력적인 음성이었다·
“역시 그에게 들은 것처럼 대단하군요· 나의 천리영음(千里靈音)에 응한 이는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
“이미 만난 적이 있을 겁니다· 남군위라고····”
진무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그렇습니다· 그는 저와 매우 절친한 사이입니다·”
진무원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는 남군위가 말한 큰 그림을 그린 자가 눈앞의 사내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당신이군요· 운남성에서 일어나는 일을 계획한 자가·”
“군위가 거기까지 이야기했나요?”
금단엽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당신이라면 그 이상도 말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군위가 그렇게 처참하게 당한 것은 생전 처음 보았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호기심이 생겼구요·”
금단엽은 남군위의 호승심과 무공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남군위는 광오한 성격에 걸맞은 강대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최소한 운남성에서 그를 상하게 할 만한 자는 몇 명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안심하고 그에게 임무를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남군위가 진무원에게 상처를 입고 돌아오면서 한 치의 틈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던 그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예정에 없는 변수의 등장이었다· 그가 염두에 둔 변수 어디에도 진무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것이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였다·
“결례가 안 된다면 진 소협의 사문을 알 수 있을까요?”
“사문이라 할 만한 곳은 없습니다· 그저 가전으로 전해지는 무공을 조금 익혔을 뿐·”
“가문이 대단한 곳인가 보군요·”
“그리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이미 망해 버려서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으니까요·”
“그런가요?”
금단엽이 진무원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맑고 투명한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 앞에선 그 어떤 거짓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금단엽을 마주 보는 진무원의 눈빛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 진무원의 눈빛에 금단엽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무원의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마치 천년거암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가지고 있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눈의 굳건함은 곧 마음의 굳건함이었다· 그 말은 곧 진무원의 가슴속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 서 있음을 의미했다· 이런 자들은 결코 외부의 유혹이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금단엽은 알고 있었다·
“가문을 말해주기 싫다면 한 가지만 더 물어보죠· 이곳엔 왜 온 겁니까? 설마 당신도 운중천에 동조하는 건가요?”
“운중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진무원의 대답에 금단엽이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여섯 달 전에 이곳에서 백룡상단 사람들이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제 지인이 끼어 있습니다·”
“····”
“이젠 내가 묻겠습니다· 그때 실종되었던 사람들 아직 살아 있습니까?”
“흠!”
금단엽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니까 지극히 개인적인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군요?”
“당신은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기는 합니다만····”
“그들만 돌려보내 주십시오· 그럼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금단엽이 난처하단 표정을 짓자 진무원의 얼굴에 한 겹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러자 공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돌려주지 못하겠다는 거군요?”
“지금 당장은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들을 돌려보내면 제가 곤란해지거든요·”
“····”
“그럼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계획한 일이 끝나면 무사히 돌려보내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요·”
금단엽이 중재안을 내놨지만 진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금단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역시 그 정도로는 안 될 모양이군요· 이거 진퇴양난이군요·”
금단엽이 팔짱을 낀 채 잔뜩 인상을 썼다· 얼핏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진무원은 믿지 않았다·
‘협상의 여지? 그런 것 따윈 애초에 없었다· 최소한 저자의 의중에는·’
누가 알려줘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금단엽은 진무원을 관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을 뿐이다· 자신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은 변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얼핏 보기엔 무척 부드럽고 합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무원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사람일수록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결국 우리는 피가 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군요· 이것 참 슬프군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는데·”
마지막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금단엽은 친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눈높이를 충족시킬 만한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이었다·
몇 마디 섞지 않았지만 그는 진무원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신과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것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와 자신은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진무원이 설화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차갑던 공기가 더욱 차갑게 냉각됐다·
진무원의 기백이 전해져 오고 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전에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남자군· 하나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금단엽이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그를 위해서 이 모든 그림을 그리고 준비했다· 진무원이 마음에 든다고 그 계획을 철회할 수는 없었다·
진무원이 금단엽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딱 그만큼 금단엽이 뒤로 물러났다·
“도망갈 생각입니까?”
“당신과 내가 싸울 곳은 이곳이 아닙니다· 이렇게 초라하고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곳에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지요·”
금단엽이 어깨를 으쓱하는 순간 진무원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금단엽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진무원은 그냥 이대로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피잉!
그 순간 숲 속에서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연이어 날아왔다· 남군위와 싸울 때 방해하던 궁수와 같은 이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 방해는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진무원은 설화로 화살을 튕겨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진무원은 순식간에 금단엽과의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만큼 도달한 순간 갑자기 금단엽이 금을 튕겼다·
따라랑!
“크윽!”
진무원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보이지 음파가 해일처럼 덮쳐왔기 때문이다· 그가 음파를 헤치고 나왔을 때 금단엽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그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와 계집 노인과 아이 양(陽)과 음(陰)·
내가 아는 세상은 항상 둘이라네·
허상과 실상은 하나같아서 마음이 가는 곳을 보게 되지·
하늘은 은밀한 밤을 꿈꾸고 은밀한 밤은 껍질을 깨길 바란다네·
멸망의 땅에서 일어난 자여
서두르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
끊어질 듯 이어지던 노래가 끝났을 때는 금단엽은 물론이고 화살을 쏜 자의 기척도 완벽하게 사라지고 오직 진무원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