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4장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2)
진무원과 하진월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곤명으로 돌아왔다· 태평객잔 앞에 도착하자 하진월이 작별을 고했다·
“아까 내가 한 말 명심하거라·”
“정말 같이 가지 않으실 겁니까?”
“흐흐! 내가 굳이 그 진흙탕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지· 이렇게 마음 편히 살고 있는데 뭐 하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겠느냐?”
“두려운 것은 아니구요?”
진무원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하진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당신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나같이 당신의 기행을 언급하며 제대로 미쳤다고 하더군요·”
“흐흐! 뭐 어느 정도는 미친 것도 사실이지· 그런데 네놈 생각은 다르다 이 말이냐?”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엔 미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당신을 그렇게 절박한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 같더군요·”
미친 자의 행동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이성이 마비되었기에 논리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진월은 달랐다· 그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일삼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였다· 극한까지 몰린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이것이 또 어떻게 천지의 이치와 조화가 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것 같았다·
미친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시발점이 무엇이든 간에 결코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진무원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그를 그렇게 절박한 구석으로 몰아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제멋대로 넘겨짚지 마라· 나를 네놈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물론입니다· 그래도 추측해 볼 수는 있지요·”
“흥! 하여간 내 말 절대 흘려듣지 말거라· 그래도 정 해야겠다면 옥계(玉溪)에 가보거라·”
“옥계?”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딱 거기까지다· 그것도 무진과의 정리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잘해보거라·”
하진월이 휘적거리며 빗속으로 사라져 갔다· 진무원은 한참 동안이나 하진월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형!”
곽문정이 진무원을 반가이 맞았다·
“심심하지는 않았느냐?”
“무공을 익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형은 갔던 일은 어떻게 잘됐나요?”
“원하던 바는 다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소기의 성과는 얻은 것 같구나·”
“다행이네요·”
“내일 아침 일찍 옥계로 갈 테니 미리 준비해 놓거라·”
“알았어요·”
“식사는?”
“아직요· 형이랑 같이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출출하구나· 같이 먹자·”
“예!”
진무원은 점소이를 불러 간단한 음식 몇 가지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초저녁부터 내린 비는 시간이 가도 멈출 줄 모르고 오히려 더욱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진무원과 곽문정은 한동안 말없이 비가 내리는 곤명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무원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하진월이 한 말 때문이었다·
“누군가 거대한 판을 짰어· 겨우 운남성의 패권을 장악하자고 이 정도의 판을 짰을 리 없을 거야· 누가 됐든 간에 이번 사태에 휩쓸리는 순간 거센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거야·”
하진월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진무원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적귀병단주라는 남군위도 그런 말을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자신은 수족에 불과할 뿐이라고·’
적귀병단을 수족으로 부리는 자·
그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렇게 되니 그때 남군위를 잡지 못한 것이 더 아쉬웠다·
“형!”
그때 곽문정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왜 그러느냐?”
“방금 전 형 굉장히 무서웠어요·”
“내가?”
“예!”
곽문정이 얼어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무원은 알지 못했지만 조금 전 질식할 듯한 그의 존재감이 객잔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때문에 곽문정을 비롯한 점소이는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였다·
점소이가 주눅 든 얼굴로 쟁반을 들고 진무원이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저 손님 음식 나왔습니다·”
점소이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자 진무원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점소이는 진무원의 탁자에 급히 음식을 내려놓고 후다닥 주방으로 도망갔다· 그 모습에 진무원이 쓴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운을 개방한 것이 미안했다·
“먹자꾸나·”
“예·”
두 사람은 말없이 젓가락질을 했다·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 ☆
유가의방(柳家醫房)은 침술이 뛰어나기로 곤명에서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평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유 의원이었지만 오늘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의원님 여기 침 좀 놔주시오·”
“잠시만 기다리시오· 여기 먼저 보고 있는 환자가 있으니·”
“크!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알겠소· 금방 가겠소·”
여기저기서 환자들이 아우성이었다·
일반적인 환자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무기를 가지고 있는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상처 또한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검이나 도로 인한 자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꺼번에 스무 명이 넘는 환자가 몰려와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니 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몇 안 되는 제자들까지 동원해 환자들을 돌보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직 그의 제자들은 이런 상처를 치료할 만큼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환자들의 목소리와 신음 소리가 섞여 유가의방 안은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제기랄! 백룡상단만 아니었어도 모조리 쫓아냈을 텐데· 이 오밤중에 이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유 의원이 상처를 치료하는 무인들은 바로 백룡상단의 보표들이었다· 적귀병단에게 상처를 입은 이들을 이곳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한 것이다·
서초경도 백룡상단의 보표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배에 검상을 입고 있었는데 동여맨 붕대 사이로 진물이 흘러나와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그가 유 의원을 불렀다·
“의원님 여기 좀 빨리 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크윽!”
그러나 유 의원은 다른 환자들을 돌보느라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사이 서초경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크윽!”
“내가 잠깐 봐주겠습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지독한 통증에 정신이 없는 서초경은 무작정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폈다·
“흠! 상처가 아주 짓이겨졌군· 일반적인 검이 아닌 중병기에 당한 상처군·”
“의 의원님 어떻게 나을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병신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예?”
“아 죽을 것 같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흐흐!”
서초경이 고개를 들어 상처를 살펴보는 의원을 보려 했다· 하지만 눈에 초점이 맞지 않아 의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 순간에도 의원은 서초경의 상처를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중원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패도적인 종류의 무공이군· 이런 상처를 입어서는 쉽게 완치도 되지 않겠어· 죽이진 못하더라도 전투력만큼은 확실히 뺏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무공이군· 당금 강호에 이런 무공을 사용하는 단체가 있던가?”
“의원님 치료는····”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장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치료를 해주셔야···· 크윽!”
“괜찮을 겁니다·”
“아!”
의원은 다시 서초경의 붕대를 감아주고 일어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상처의 통증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흘러나오던 고름도 멈췄다· 그사이 치료를 해준 의원의 모습은 사라졌다·
뒤늦게 유 의원이 서초경에게 다가왔다· 그가 서초경의 붕대를 풀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응? 자네 누가 치료해 준 것인가?”
보기 흉하게 벌어져 있던 상처가 완벽하게 지혈이 되어 있었다· 전문적인 의원의 솜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에 못지않았다·
“좀 전에 다른 의원님이····”
“다른 의원?”
유 의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자신 외에 유가의방에 이 정도의 솜씨를 가진 의원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유가의방을 빠져나온 의원은 갑자기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 잠깐 사이 그의 얼굴이 변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중년의 평범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육십 대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건 노동력 착취야· 젠장! 쉴 시간은 줘야 할 것 아냐·”
투덜거리는 목소리마저 탁한 것이 노인의 음성이었다· 하지만 말투만큼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재기 발랄하게 느껴졌다·
남자의 이름은 청인· 정보 조직인 흑월에서도 최고의 정보 수집 능력을 지녔다는 천자조의 비월이었다·
흑월 내에서 청인의 별호는 십보십변(十步十變)· 열 걸음을 걷는 동안 전혀 다른 열 명의 모습으로 변한다 해서 붙여진 별호였다· 그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 심지어는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청인의 진정한 모습을 아는 이는 오직 한 명 흑월주뿐이었다·
악양(岳陽)에서의 임무가 끝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임무가 끝나기 무섭게 이곳 운남성으로 파견된 것이다·
그가 문득 왼쪽 다리를 주물렀다·
“아파 죽겠네· 아무리 임무가 중요해도 쉴 시간은 줘야지· 임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아주 살뜰하게 부려먹는다니까· 똥통에 튀겨 죽일 인간들 같으니라구· 쳇!”
임무 중 입은 상처가 아직도 완전히 낫지 않았는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운신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지만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운남성에 출현한 정체불명의 적들을 추적하고 덤으로 진무원이란 자를 감시하라고? 내가 분신술이라도 할 줄 안다고 착각하는 거 아냐? 미친 인간들· 하여간 현장에 한 번도 나와 보지 않은 것들이 이런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내린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청인은 그 어떤 임무도 소홀히 할 생각이 없었다·
지난 며칠간 그는 백룡상단의 행적을 추적했다· 운남성에 들어와 곤명에 도착할 때까지의 행적을 샅샅이 뒤진 것이다· 그 결과 백룡상단이 운남성의 초입에서 정체불명의 적들과 싸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백룡상단과 정체불명의 적들이 싸운 현장을 찾아 면밀히 살폈다· 그는 주변의 상황과 남겨진 흔적을 통해 백룡상단을 습격한 자들의 역량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가 알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정황을 통한 추측에 불과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내야 했다· 그것이 그가 백룡상단이 치료를 받고 있는 유가의방을 찾은 이유였다·
서초경의 상처를 통해 정체불명의 적들이 쓰는 무공의 종류를 대략적으로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별 사소한 것에 신경을 다 쓴다고 하겠지만 이런 소소한 것들이 모여 중요한 정보가 되는 법이었다·
정체불명의 적들을 완전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추적할 만한 단서는 알아낸 셈이다·
“그럼 이제부터 진무원이란 자를 감시해야 하는데 어떤 얼굴이 좋으려나?”
청인의 얼굴에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노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동감이 절로 발산되고 있었다·
그의 눈에 태평객잔이 들어왔다· 열린 창문 사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진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흠!”
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