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4장 움직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온다 (1)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을 쓸어버리기라도 하듯이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비가 청석으로 된 바닥을 때리며 마치 철판에 콩을 볶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남자는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발로 서 있는 곰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대한 덩치와 그에 걸맞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는 남자는 바로 권마 조천우였다· 마치 석상이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는 그의 거대한 동체를 따라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어두운 곤명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에 따라 숨 막힐 것 같은 적막감이 사위를 지배했다·
예전 같으면 불야성을 이뤘을 곤명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태가 터지면서 운남성 전체의 경기가 악화되었고 운남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곤명은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곤명의 경기 침체는 패권회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수입이 줄면서 패권회의 운영에도 비상이 걸렸다· 줄어든 수입만큼 경비를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점창파와 운남성의 주도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던 패권회에겐 그야말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때 빗속을 뚫고 누군가 조천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버님·”
조천우와 달리 날렵한 체형에 평범한 체구의 젊은 남자의 이름은 조운경 권마 조천우의 장남이었다·
조천우의 서늘한 시선이 조운경을 향했다·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무슨 일이냐?”
“백룡상단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백룡상단?”
“여섯 달 전에 이곳에 들어왔다가 실종된 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몇 번째더냐?”
“이번이 여섯 번째입니다·”
“바꿔 말하면 여섯 개 이상의 상단이 운남성에서 실종되었다는 뜻이구나·”
조천우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이 문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저희와 연관된 상단들도 동요하고 있습니다·”
“흠!”
“이제는 그들을 다독여야 합니다·”
“····”
“아버님·”
“그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그리고····”
“예?”
조천우가 말을 끊자 조운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조천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들이나 잘 다독이거라·”
“알겠습니다·”
“물러가거라·”
“예!”
조운경이 조천우에게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물러났다· 조천우는 그런 조운경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침내 조운경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가 누군가를 불렀다·
“엽평·”
“예 주군·”
그 순간 소리도 없이 빗속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붉은 화의를 입은 사십 대 초중반의 왜소한 남자였다· 남자는 약간은 꾸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더 왜소해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엽평· 패권회의 정보 조직인 천안통의 수장이었다· 권마 조천우가 믿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네가 보기엔 운경인 어떤 것 같은가?”
“무슨 말씀이신지?”
“후계자로서 운경이 어울리는지 말이야·”
“잘하고 계십니다·”
“정말인가?”
“수하들에게 신망이 높고 일 처리도 나름 야무지십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다 좋은 그 녀석은 마음이 여린 것이 흠이야· 훌륭한 지배자가 되려면 소소한 정에 얽매어서는 안 되거늘·”
“차차 배워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엽평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조천우가 걱정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조운경은 조천우와 여러모로 달랐다· 외모뿐 아니라 성향도 백팔십도 달랐다· 패도적이면서도 불같은 성정의 조천우에 비해 조운경은 합리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패자의 업을 이어받을 녀석이야· 녀석이 나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이지 걱정되는군·”
“분명히 잘 극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주군이 호랑이라면 소주 역시 호랑이니까요·”
“어쨌거나 이번 일에서 운경은 철저하게 배제시키게· 녀석이 사실을 알면 분명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그리하겠습니다·”
“나는 겨우 운남성 한 귀퉁이로 만족할 생각이 없어· 그랬다면 그때 형님으로 모시던 진 문주를 배신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곰 발바닥처럼 두꺼우면서도 커다란 주먹에는 굳은살이 옹이처럼 깊게 박여 있다· 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자 극한으로 단련된 근육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온몸 가득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쓰지 않는 건 죄악이지·”
그의 중얼거림에 엽평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세상은 강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힘을 가진 자가 침묵을 지키는 세상은 오히려 혼돈으로 가득할 뿐이다·
조천우는 북천문의 곁가지로 남아 있기에는 너무나 큰 야망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원으로 진출해 패권을 다투길 원했다· 하지만 문주 진관호는 북벽이란 별호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밀야를 막는 북천문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했다· 세상을 오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도 어떻게 그렇게 초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세상의 권력에 무심할 수 있는지 조천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천우는 진관호가 아닌 운중천을 택했고 그 결과 운남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저 역시 그래서 주군을 따라왔습니다· 주군은 앞만 보고 가십시오· 나머지 소소한 것들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군·”
“이제 가보겠습니다 주군·”
“출발하려는가?”
“다행히 늦지 않게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운중천에서 개입하기 전에 반드시 일을 끝내야 할 게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생각보다 피를 많이 보게 될 거 같아 마음에 걸리는군요·”
“후후! 대업엔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법· 자잘한 원망이 두려워 망설일 것 같았으면 이 길을 걷지도 않았을 거야·”
“생각보다 파장이 클 겁니다· 차후 닥쳐올 후폭풍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얼마나 예상하지?”
“최소 수백 어쩌면 그 몇 배 이상의 사람이 죽어나갈 겁니다·”
“오랜만에 피비가 내리겠군·”
조천우의 거대한 몸체 위로 폭우가 쉴 새 없이 퍼부었다· 비를 맞으며 조천우는 천하를 굽어보았다·
엽평이 조천우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인 후 조용히 물러났다·
☆ ☆ ☆
조운경이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일어났다·
공진성과 윤서인 용무성과 종리무환이었다· 그들을 대표해 용무성이 인사를 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철기당주 용무성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종리 부당주 다른 분들은 백룡상단의 호상단을 이끄는 공 단주님과 윤 소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용무성 등이 자리에 앉자 조운경이 태사의에 앉았다·
‘과연!’
용무성은 그런 조운경의 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사를 터뜨렸다·
조천우처럼 패도적이진 않지만 좌중을 휘어잡는 무게감이 엿보였다· 행동과 말투는 진중하고 눈빛은 맑고 행동엔 절도가 있었다· 명문가의 혈통이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철기당에 관한 무용담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백룡상단의 의뢰를 받았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실종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든든하군요·”
조운경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용무성을 바라봤다· 용무성은 조운경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운경은 용무성의 겉모습이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겉모습은 많이 흡사했다· 사내다운 외모에 외부로 발산하는 박력까지도· 그래서 흥미가 생겼다·
그가 물었다·
“실종된 자들을 추적할 만한 단서는 찾은 겁니까?”
“아직까지는 저희도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패권회를 찾아왔습니다·”
용무성은 솔직히 속내를 털어놨다·
적귀병단과 싸우기 전이었다면 패권회에 이렇게 일찍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적귀병단은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들과 같은 자들이 운남성에 얼마나 더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패권회와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한다·’
조운경은 그런 용무성의 속내를 꿰뚫어 봤다·
이 일로 인해 천하십대상단 중 하나인 백룡상단과 든든한 고리를 만들어둘 수 있다면 패권회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조건이었다·
조운경이 물었다·
“단순히 정보의 공유를 원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도 딱히 해줄 것이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저희도 굳이 패권회를 찾아올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대답을 한 이는 공진성이었다·
그가 옆에 앉아 있는 윤서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원행의 책임자인 아가씨입니다· 실종된 윤자명 공자의 친동생이지요· 이 정도면 저희가 어떤 각오로 찾아왔는지 충분히 짐작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군요·”
조운경이 윤서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받은 윤서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라버니를 찾을 수 있도록 저희 패권회는 협조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윤 소저·”
“가 감사해요·”
조운경이 미소를 지으며 용무성과 종리무환을 바라보았다·
윤서인은 협상의 상징일 뿐 주체가 아니었다· 용무성과 종리무환이 이제부터 그가 상대해야 할 존재였다·
“이제부터 기나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군요· 부디 좋은 협상 결과가 도출되길 바랍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조운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밖에서 문사 복장을 한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패권회의 책사들이었다· 본격적인 협상은 그들이 할 것이다·
조운경의 역할은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강호에 더 이상 정의나 의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조그만 이권에도 목숨을 거는 아귀다툼만이 존재할 뿐· 차라리 북방에 있던 때가 그립구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그때는 정말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무원 너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하구나· 하나 난 이미 멈출 수 없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 끝에 절벽이 있더라도 결코 내릴 수가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