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2장 북에서 온 검호(劍豪) (2)
또로록!
검신을 타고 핏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핏물이 검신을 미끄러지듯 흘러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첨에 맺힌 핏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뚝!
“아!”
그리고 마침내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넋을 빼앗기고 있던 이들이 그제야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크윽!”
남군위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동강이 난 방천화극을 지지대 삼아 겨우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의 옆구리에서는 길게 갈라진 채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스러운 통증은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
남군위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자랑하는 불패의 초식이 깨졌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다·
소리도 흔적도 그 어떤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검에 당한 것 같았다·
‘완벽한 암살자의 검·’
차이가 있다면 암살자가 숨어서 적을 노리는 데 반해 진무원은 정면 대결을 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진무원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단천해는 그림자 내공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초식이다· 형태도 없고 흔적도 없다· 상대의 그림자에 숨어 호흡을 끊는 암살자의 검식이었다·
상대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지금의 남군위처럼·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실전에서 처음 펼치다 보니 진무원의 호흡이 약간 흐트러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 한 수로 남군위의 숨통을 완벽하게 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진무원이 물었다·
“이제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백룡상단의 실종이 당신이 속한 곳과 관련 있습니까?”
남군위가 입술을 꽉 다문 채 진무원을 노려봤다·
세상의 변화와 상관없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오연히 서 있지만 그것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검이었다·
날카롭게 잘 벼려진 한 자루의 살기 어린 검·
남군위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렇다·”
“역시 그렇군요·”
“하나 그 이상의 대답은 내게서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진무원이 남군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결코 이 정도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남군위를 완전히 굴복시켜 진실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그런 진무원의 생각을 읽은 남군위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이었다·
핑!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전에 울려 퍼졌다·
검을 휘두르려던 진무원이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고 뒤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그가 있던 자리에 화살이 박혔다· 화살에는 가죽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는데 땅에 박히는 충격으로 찢어지면서 매캐한 녹연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이상함을 느낀 용무성이 소매로 입을 막으며 소리쳤다·
“독이다! 모두 뒤로 물러나라!”
그의 외침에 철기당의 무인들과 백룡상단의 보표들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몇몇은 피하는 게 늦어 그대로 독연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으아악!”
독연을 뒤집어쓴 무인들이 목을 붙잡은 채 쓰러져 괴로워했다·
진무원은 호흡을 멈춘 채 앞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다시 화살이 연이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쇄애액!
화살에 담긴 힘이 어찌나 강맹한지 진무원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화살을 막는 대신 피하며 앞으로 돌진했다·
퍼퍽!
그가 이제까지 서 있던 자리에 화살 두 대가 박혔다· 어찌나 강력한 힘으로 발사했는지 꽁지깃까지 바닥에 박힌 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큭!”
독연을 헤치고 나온 진무원의 표정이 굳었다· 남군위와 적귀병단이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 적들이 모조리 물러난 것이다·
“휴!”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위기를 벗어났다고 여긴 백룡상단의 무인들이 터뜨린 것이다· 표현은 안 했지만 철기당의 무인들도 그들과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용무성이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이보게 우리····”
그 순간 진무원이 몸을 날렸다· 남군위와 적귀병단이 사라진 방향이었다·
“저 저····”
용무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며 당미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는 이대로 그들을 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네요·”
“으음!”
당미려가 진무원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 격랑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진무원이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주위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 나갔다·
계류보(溪流步)·
언젠가 소무상에게 전해준 그 보법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무원이 펼치는 계류보는 소무상에게 전수해 준 것과는 또 달랐다· 그사이 진무원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었다· 마치 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 것처럼 진무원은 그렇게 바람 속에 녹아든 채 남군위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비록 흐릿하긴 하지만 바닥에는 남군위와 적귀병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풀잎이 꺾인 방향과 희미한 발자국의 흔적을 토대로 진무원은 무서운 속도로 남군위 등을 따라잡고 있었다·
‘황숙의 행방을 알아내려면 반드시 그를 잡아야 한다·’
진무원이 이를 악물었다·
남군위가 속한 단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들이 가공할 힘을 소유하고 있단 사실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단체를 상대로 시간을 질질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한편으로는 남군위가 속한 단체의 정체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지금 운남성에서 행하는 일은 패권회뿐만 아니라 강호 전체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강호의 이목을 운남성으로 집중시킨 것인지도 몰랐다· 그 말은 곧 강호 전체를 상대로 어떠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뜻이고 그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진무원은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가슴은 거세게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진무원은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마치 송곳으로 머리를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에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피이잉!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가 고개 숙인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살?’
진무원의 뒤쪽 나무에 박혀 부르르 떨리고 있는 기다란 물체는 분명 화살이었다·
소리보다 화살이 더 빠르게 날아왔다·
전방위 감각이 경고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죽을 뻔했다·
남군위를 구하는 데 일조하던 미지의 궁수가 진무원의 추적을 알아차리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가 진무원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사이 남군위와 적귀병은 이곳에서 멀어지고 있을 것이다·
진무원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전방위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끌어올렸다·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엔 석 대가 거의 동시에 날아왔다· 시간차도 거의 없는 것이 한꺼번에 날린 것 같았다· 무서울 정도의 연사였다·
촤촤촹!
진무원은 설화를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을 모조리 쳐냈다· 설화를 잡은 손아귀가 저려오는 것이 화살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철기당의 궁수인 낙일철궁 담진홍과 비견될 정도의 실력이었다·
사사삭!
미지의 적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진무원을 향해 연신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가 숨어 있는 곳을 가늠하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진무원에겐 전방위 감각이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잡아낼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방향 정도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쉬익!
진무원이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더니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다· 유난히도 수풀이 우거지고 아름드리나무가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헛!”
그 순간 누군가의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확히 방향을 짚고 달려오는 진무원의 모습에 놀란 미지의 궁수가 경호성을 터뜨린 것이다·
핑! 피이잉!
미지의 궁수가 진무원을 저지하기 위해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독사의 이빨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제아무리 진무원이라 할지라도 정면으로 받아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이번에도 피하는 대신 정공법을 택했다·
쉬가각!
그의 검이 허공에 묵빛 궤적을 그렸다· 궤적에 걸린 화살들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순간 진무원의 감각에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미지의 궁수가 이동하는 소리였다· 이전처럼 화살로 진무원의 주위를 돌린 후 은신하려는 것이다·
진무원이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하더니 미지의 궁수가 이동하려는 방향을 향해 먼저 몸을 날렸다·
“헉!”
설화가 허공을 긋는 순간 수풀 속에서 예의 헛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야를 가리던 무성한 수풀이 설화에 베어져 나가며 허공으로 흩날리고 이제까지 정체를 숨긴 채 진무원을 공격하던 미지의 궁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키가 작은 남자였다· 보통 사람 가슴 어림 정도의 키에 어울리지 않는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다부진 그의 손에 들린 자줏빛 활 한 자루·
“크윽!”
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라 있다·
먼 거리에서 적을 암살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자줏빛 철궁 한 자루로 그가 죽인 사람의 수만 세 자리가 훌쩍 넘었다·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 동안 단 한 번도 정체를 들켜본 적이 없다·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이····’
순식간에 그가 은신해 있는 곳을 찾아내는 감각과 날카로운 판단력 그리고 거침없이 돌진해 오는 추진력과 저돌적인 기세· 그 무엇 하나 위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쉬각!
진무원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묵빛 검신에 요요로운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이 궁수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젠장!”
본능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궁수는 자줏빛 활을 들어 자신의 전면을 막았다·
카앙!
쇳소리와 함께 궁수의 몸이 뒤로 밀려났고 그가 들고 있던 자줏빛 활체엔 깊은 흠이 생겨났다·
“큭!”
자신도 모르게 궁수의 입술을 비집고 억눌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진무원의 한 수에 내장이 진탕된 것이다·
궁수는 진무원의 다음 공격이 들이닥칠 것을 직감했다·
‘이번엔 막지 못한다· 그렇다면····’
순간 그의 눈에 악독한 빛이 떠올랐다·
푸욱!
진무원의 검이 그의 어깨를 찌르며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일단 제압해 배후를 캐내려 했다·
그런데 검에 찔린 궁수가 오히려 양팔을 활짝 펼치며 진무원의 몸을 껴안았다·
“흐흐! 같이 죽는 거다·”
그가 진무원의 귀에 속삭였다·
살기가 담긴 오싹한 음성에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역시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진무원이 궁수의 팔을 풀고 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의 팔은 마치 족쇄처럼 진무원의 몸을 억세게 옭아매었다·
푸쉬쉬!
궁수의 몸에서 갑자기 녹연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진무원은 급히 호흡을 멈추며 공력을 끌어올려 외부로 방출했다· 그러자 궁수의 팔이 살짝 벌려지며 틈이 생겼다· 진무원은 그 사이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며 궁수와의 거리를 벌렸다·
잠깐 사이 녹연이 더욱 짙어지더니 궁수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진무원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궁수의 몸이 촛농처럼 녹아내렸다·
“크으윽! 우리의 일을 방해한 이상 네놈의 끝도 결코 좋지 못하리라·”
“당신들은 도대체 누굽니까?”
“흐흐! 이건 시작에 불과···· 천하여 천하여····”
저주를 하듯 읊조리던 궁수의 목소리가 끊겼다· 독연에 완전히 녹아내린 것이다·
진무원은 참담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궁수의 시신은 한 줌의 혈수로 변해 사라지고 가공할 독기는 자줏빛 철궁마저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리고 말았다·
“결국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군·”
진무원의 탄식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