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1장 은원의 탑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기만 하다 (2)
쿠콰콰!
엄청난 기세를 발산하며 달려오는 붉은 갑주의 무인들을 보며 채약란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덜덜!
근처에 있는 백룡상단 보표들의 떨림이 느껴졌다· 공포는 전염이 되게 마련이고 기세에서 한번 밀리면 기울어진 무게 추를 다시 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환이 실수했어·’
위기에 처한 당가의 무인들을 외면하던 모습이 백룡상단의 보표들에겐 힘이 모자라 위험을 회피하는 행위로 보였을 것이다·
그 순간 절대적인 믿음이 깨졌고 철기당의 무력에 의심을 갖게 됐다· 불안은 증폭되고 두려움이 엄습하는데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용무성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무환에게 전권을 넘긴 것이 실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 내가 나서야 했는데·’
종리무환이 진무원을 배척한 것처럼 자신 역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리를 두었으니까· 그 때문에 추한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그러나 후회를 해봐야 이미 늦었다·
‘우선은 지금의 위기를 넘겨야 한다·’
용무성이 용린도를 꼬나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모두 정신 차려라! 진홍은 지원 확실히 하고!”
“옛!”
담진홍이 활에 시위를 먹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붉은 갑주의 무인을 겨누는 담진홍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쉬익!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그의 손을 떠났다·
노리는 곳은 머리· 붉은 갑주로 보호받지 못하는 유일한 부위였다· 담진홍은 이번 한 수에 목표의 숨통을 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퍼억!
그러나 그의 믿음과 화살은 붉은 갑주의 무인이 휘두른 커다란 낭아도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붉은 갑주의 무인은 담진홍이 머리를 노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저 녀석!’
마치 먹이를 노리는 늑대 같은 그의 눈빛에 담진홍은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우와아!”
그사이 붉은 갑주의 무인들과 철기당 백룡상단의 무인들이 뒤엉키며 난전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비명성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피가 치솟아오르고 누군가의 팔다리가 떨어져 바닥에서 퍼덕였다· 그 속에 윤서인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주검이 쌓이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있다·
공동파에서 무공을 익혔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제 한 몸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억지를 부려 이번 원행에 참여했다· 그 어떤 위협 속에서도 자신은 안전할 거라 착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직면한 현실은 잔인했다· 눈앞에서 그녀가 오래전부터 봐오던 보표가 목숨을 잃고 그의 주검이 쓰레기처럼 발치에서 나뒹굴고 있다·
윤서인은 그의 부릅뜬 눈에서 생명의 빛이 사라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덜덜!
죽문검을 잡은 손이 절로 떨리고 있었다· 정신을 다잡아야지 하면서도 방금 전 죽은 보표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았다·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향해 붉은 갑주의 무인이 다가왔다·
쉬아악!
그의 손에 들린 낭아도가 목을 노리고 날아왔지만 윤서인은 그런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쩌엉!
위기에 처한 그녀를 구한 것은 근처에 있던 채약란이었다· 그녀가 대신 낭아도를 쳐낸 것이다·
“정신 차려! 그냥 넋 놓고 죽을 셈이야?”
채약란의 외침에 윤서인은 정신을 차렸다·
“미 미안해요·”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켜야 해· 정신 바짝 차려·”
“알겠어요·”
윤서인이 죽문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의 떨림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눈가의 떨림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강호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그녀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죽음이 난무하는 한가운데 진무원과 남군위가 서 있었다·
남군위 때문인지 붉은 갑주의 무인들은 진무원을 지나쳐 갔다· 남군위 역시 그런 붉은 갑주 무인들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으악!”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들려오자 진무원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비록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아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죽음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무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남군위의 강력한 존재감 때문이었다· 남군위는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기파를 발산하고 있었다·
남군위가 발산한 기파는 마치 뱀의 혓바닥처럼 소름 끼치게 진무원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기파를 이용해 진무원의 능력을 가늠해 보려는 것이다·
이 정도의 기파가 전신을 자극하면 대부분의 무인은 무의식중에라도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게 마련이다· 그것이 남군위가 아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진무원은 남군위의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그는 마치 기파를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무공을 모르는 자이거나 혹은 자신의 신체 반응마저도 완벽히 조절할 수 있는 자·’
남군위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진무원이 보이고 있는 여유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문득 남군위의 시선이 진무원의 등 뒤에 있는 당미려를 향했다·
“어이 계집! 이들이 죽는 것은 모두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일이 이리 커졌으니 그 책임도 져야 할 거야·”
그의 음성에 담긴 가공할 살기에 당미려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에게 당가의 젊은 무인 세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독은 어떨지 모르지만 일반 암기로는 그가 입고 있는 붉은 갑주를 뚫을 수 없었다·
‘이들은 당가의 천적이다·’
누가 봐도 이들은 당가를 겨냥해 만든 전력이었다· 그것도 최소 수년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신에 소름이 올라왔다·
미지의 적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단순히 당가를 노리고 이런 준비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당미려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가가 비록 오대세가에 들어가는 초강 세력이긴 하지만 이 정도의 인적 자원과 엄청난 시간을 들여가며 준비할 만큼 큰 원한을 진 적은 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어·’
그녀는 암류(暗流)가 흐르고 있음을 직감했다·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고 절로 몸이 떨렸다· 미지의 공포에 먼저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감당하기 힘든 것은 남군위의 살기 어린 시선이었다·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의 눈빛처럼 잔혹하게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은 아직 강호 경험이 일천한 그녀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스윽!
그때 그녀와 남군위 사이에 끼어드는 존재가 있었다·
“아!”
순간 당미려는 자신에게 가해지던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피에 젖은 대지와 같은 적갈색 무복을 입은 남자는 바로 진무원이었다· 그가 당미려에게 가해지는 남군위의 살기 어린 시선을 대신 받아낸 것이다·
“흥!”
남군위가 코웃음을 치며 등 뒤에 메고 있던 방천화극을 손으로 잡았다· 그러자 그의 기도가 일변했다·
마치 거대한 화강암처럼 전신을 짓눌러 오는 엄청난 압박감과 기파 속에서도 진무원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은 당미려의 뇌리에 화인처럼 선명하게 각인됐다·
남군위가 방천화극을 진무원에게 겨누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겠지?”
“그랬다면 아예 끼어들지도 않았을 겁니다·”
진무원의 담담한 대답에 남군위가 미소를 지었다·
“어디 배짱만큼 실력이 있는지 확인해 보지·”
남군위가 공력을 끌어올렸다·
지잉!
순간 방천화극이 강한 울림을 토해내며 칼날 같은 기파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살갗이 베어져 나갈 듯 날카로운 기파에 진무원의 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진무원의 눈빛이 깊이 침잠했다·
남군위는 중원에 들어온 이후 처음 상대하는 초강자였다· 공동파의 무진도 대단한 고수였지만 남군위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다· 흥분되지도 긴장되지도 않았다· 마치 의식이 육신과 분리된 것처럼 지금의 사태를 그는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싸우기 전에 물을 게 있습니다·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백룡상단을 비롯한 여타 상단의 실종 당신들과 관련된 겁니까?”
“글쎄····”
남군위가 묘한 미소와 함께 말끝을 흐렸지만 진무원은 그가 연관이 있다고 확신했다·
진무원이 다시 물었다·
“현재 운남성에서 벌어지는 일 당신이 주도하는 겁니까?”
“훗! 나를 과대평가하는군· 나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자는 따로 있지·”
“그게 누굽니까?”
“궁금한가?”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군위가 미소를 지었다· 짓궂은 장난을 눈앞에 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었지만 진무원은 뻔히 보이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남군위의 겉모습만 볼 뿐이지만 진무원의 눈에는 그의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기파가 똑똑히 보였다· 폭풍처럼 사납고 가차 없는 폭군과도 같은 기운이 시간이 갈수록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남군위가 진무원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궁금하면 나를 이겨·”
“그럼 말해주겠습니까?”
“어쩌면····”
“그럼····”
팟!
순간 진무원의 모습이 남군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군위가 본능적으로 방천화극을 세워 자신의 앞을 막았다·
쩌엉!
순간 방천화극에 강렬한 충격이 가해지면서 남군위의 몸이 십여 장이나 뒤로 밀려났다· 그의 발이 대지에 길게 고랑을 남겼다·
“놈!”
남군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온몸을 저릿하게 울리는 강렬한 충격의 여운이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남군위가 서 있던 자리에 진무원이 서 있다· 그의 손엔 어느새 설화가 들려 있었다·
“그럼 당신을 쓰러뜨리고 다시 물으면 되겠군요·”
진무원이 남군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