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2장 동행(同行),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 (3)
진무원은 큰 솥에 화과를 가득 끓여 내놨다·
“이거 끝내주는데?”
“후아!”
화과를 맛본 보표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감탄했다· 처음엔 몇 명 정도만이 맛보는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근처에 있던 보표들이 전부 달려들어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들은 진무원의 솜씨를 앞다퉈 칭찬했다·
“이거 자네한테 미안하구만· 정작 자네는 제대로 먹지도 못했잖은가·”
“괜찮습니다· 만들면서 많이 먹었습니다·”
“괜찮다면 앞으로 음식은 자네가 해주게· 다른 놈들이 만든 건 영 맛이 없어서 말이야· 허허!”
나이든 보표가 넉살좋게 말하자 옆에 있던 보표들이 한두 마디씩 떠들었다·
진무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나 싫으나 두 달여를 함께해야 할 사이다· 애써 가까워질 필요도 없지만 굳이 멀리할 이유도 없었다·
빈 그릇을 치우는 것은 젊은 보표들 몫이었다· 그들은 근처 개울가에서 순식간에 설거지를 마쳤다·
진무원은 설화를 품에 안고 마차 바퀴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부신 별들의 바다가 쏟아질 듯 일렁이고 있다· 진무원은 신비로운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그 앞으로 다가왔다·
“음식 솜씨가 훌륭한 모양이에요· 다들 소협 이야기를 하네요·”
나직하면서도 그윽한 목소리에 진무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설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그녀의 목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흉터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다·
“곁에 앉아도 될까요?”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전에 공진성이 소개해 준 사실이 기억났다·
‘철기당의 부당주 채약란이라고 했던가?’
그녀가 바닥에 앉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채약란이라고 해요·”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진 소협·”
진무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채약란을 바라봤다· 채약란이 자신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백룡상단에서는 철기당의 무인들을 극진하게 대했다· 가장 좋은 말을 내준 것도 모자라 따로 전담 보표를 두어 그들의 수발을 들게 할 정도였다·
저녁에도 그들을 위해 따로 요리가 만들어졌다· 숙수 출신의 보표가 특별히 그들을 위해 만든 것이다· 당연히 음식의 질과 맛이 일반 보표들이 먹는 것과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채약란은 그렇게 특별대우를 받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현재로써는 일개 보표만도 못한 진무원에게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진무원의 표정을 읽었는지 채약란이 담담히 말했다·
“다음엔 저도 진 소협이 만든 화과를 먹고 싶군요·”
“채 소저 같은 분이 드실 만큼 대단한 음식은 아닙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그런 음식이에요· 간편하게 먹을 수 있으면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그런데 진 소협이 만든 화과가 그렇더군요·”
보표들은 알지 못했지만 채약란은 타고난 무광(武狂)이었다· 철기당에서도 그녀는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서 무공을 익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잠자는 시간은 물론이고 음식을 먹는 시간마저 아까워했다·
결국 채약란이 진무원을 찾아온 것도 그가 만든 화과가 가장 간편히 먹을 수 있으면서도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을 거란 계산 때문이었다·
“조금 더 만들어야겠군요·”
“고마워요· 보표 일을 하느라 힘들 텐데 이런 부탁까지 해서·”
“보표가 아닙니다·”
“네?”
“사정이 있어서 운남까지 동행하는 것일 뿐 보표는 아닙니다·”
“아!”
처음으로 채약란의 표정이 변했다·
다른 보표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아 편하게 대했는데 보표가 아니라니 당황한 것이다·
진무원은 그 모습이 꽤나 재밌다고 생각했다·
“공짜로 가는 것이 아니라서 어차피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화과 한 그릇 더 만드는 일은 일도 아니니까 부담 없이 드십시오·”
“미··· 안해요· 전 그만 보표인 줄 알고····”
“미안해하실 거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채약란이 그런 진무원의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 소협은 꽤 특이한 사람이군요·”
“제가 말인가요?”
진무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약란이 보기엔 이상한 사람이 맞았다·
채약란이 속해 있는 철기당은 강호에서 매우 유명한 단체였다· 비록 소수로 이뤄져 있지만 꽤나 많은 무인이 그들을 선망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채약란은 유일한 여성 무인이다 보니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제아무리 강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채약란을 대면하게 되면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그러나 진무원은 달랐다· 채약란이 옆에 앉아 있는데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녀의 미모에도 큰 감흥이 없는 것 같았다·
채약란이 진무원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진무원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은 다른 보표들 수준 정도였다· 무공을 익혔으되 높은 경지까지 익힌 것은 아니란 뜻이다· 단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눈빛이었다·
유달리 검은 눈동자는 속내를 읽을 수 없을 만큼 유현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채약란이 잠시 흠칫했다·
‘이 남자?’
“누님·”
그 순간 옆에서 들려온 한줄기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종리무환이 어느새 다가와 있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응? 아 그냥····”
“의논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당주님과 합류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도 많구요·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종리무환의 말에 채약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은 일보일계라 해서 경외시하지만 채약란에겐 그저 말 많은 잔소리꾼 동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채약란의 입장이었다·
채약란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화과 좀 부탁할게요·”
그녀가 진무원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종리무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채약란은 결코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무척 아름다워 보이지만 기실 그녀는 누구보다 승부욕이 강했고 결코 누군가에게 쉽게 미소를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흠!”
종리무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그 화과 저도 맛보고 싶군요·”
진무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종리무환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종리무환이 미소를 활짝 지어 보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채약란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진무원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머리가 아파왔다·
황야의 밤은 도성보다 일찍 찾아왔다· 모닥불을 피우고 있어도 불빛이 밝힐 수 있는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고 나머지는 오직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늑대나 도적이 습격해 오기 최적의 환경이다· 그 때문에 보표들은 돌아가면서 번을 서야 했다·
늦은 시간에도 종리무환은 철기당의 무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운남성에 들어간 후의 일을 상의하는 것이다·
주로 종리무환이 이야기를 하고 채약란이나 다른 사람은 듣는 편이었다· 간혹 임진엽이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결국 종리무환의 논리정연한 말에 본전도 못 찾고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이 보였다·
“하하하!”
그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서 불을 쬐고 있는 보표들도 자기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곽문정이 양어깨를 손으로 문지르며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아 춥다·”
“교대를 한 것이냐?”
“예 이제부터 출발할 때까지 쉴 수 있어요·”
아직 어리다 해도 곽문정 역시 보표였다· 원행에 나선 이상 남들과 똑같이 번을 서야 했다· 그래야만 보표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곽문정은 당당한 보표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런 곽문정의 모습에서 진무원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경우는 다르지만 그 역시 어려서부터 홀로 일어나려 노력해 왔다· 자신이 어린아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러한 인식이 지금의 진무원을 만들었다·
잠시 눈을 붙일 만도 하건만 곽문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운공을 하려느냐?”
“예·”
곽문정의 대답에 진무원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몇몇 특별한 심공을 빼면 운공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게 상식이다·
아무리 조용하더라도 이곳은 운공하기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 곽문정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이곳에서 운공을 하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 조용한 곳에서 운공하지 않고? 이런 곳에서는 집중이 되지 않을 텐데·”
마음의 평정심이 깨지면 주화입마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인은 운공을 할 때면 호법을 세우거나 조용한 곳을 찾아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돌아온 곽문정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황 아저씨가 그랬어요· 제게 가르쳐 준 심법은 이런 곳에서 익혀도 상관없다고·”
“황숙이?”
진무원의 눈이 빛났다·
“심법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삼원심법이라고 했어요· 나중에 이 심법이 저를 고수의 길로 인도해 줄 거라고 했어요·”
“삼원심법?”
진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황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