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1장 때론 예상치 못한 인연도 있다 (2)
진무원이 고개를 들자 백룡상단의 현판이 보였다· ‘백룡’이라는 이름만큼 힘차고 웅혼한 글씨가 인상적이었다· 분명 명인의 솜씨일 것이다·
진무원의 상념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네는 누군가?”
허리에 검을 찬 무인 두 명이 진무원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백룡상단의 정문을 지키는 수문무사들이었다· 그제야 진무원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소생은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보표로 있는 곽문정이란 아이를 찾아왔습니다·”
“곽문정? 호상단에 있는 그 곽문정 말인가?”
다행히 수문무사 중 한 명이 곽문정을 아는 모양이었다· 이제 사십 대 초중반에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남자였는데 그가 수문무사 중 가장 연장자인 듯했다·
그가 진무원을 향해 다가왔다·
“문정이를 어떻게 아는 건가?”
“직접 아는 것은 아니고 숙부와 친했다고 들어서 찾아왔습니다·”
“숙부?”
“이곳에서 보표로 있던 황철이란 분이 제 숙부입니다·”
“그럼 자네가 황 형님의 조카란 말인가?”
수문무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숙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 형님하고는 사흘에 한 번씩 꼭 술을 마셨지· 그 형님이····”
수문무사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황철이 근 여섯 달 동안이나 소식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럼 황 형님 행방을 찾으러 온 것이겠군·”
진무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문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나를 따라오게· 문정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진무원은 수문무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백룡상단 내부는 무척이나 거대했다· 한창 때의 북천문도 현재의 백룡상단에 비할 바는 아닌 듯했다·
“백룡상단은 처음 오는 거겠지?”
“예·”
“처음 오는 사람은 모두 백룡상단의 전각에 압도당하는데 자네는 그런 것 같지 않군·”
“많이 놀라고 있습니다· 엄청나군요·”
“천하십대상단 중 하나가 아닌가· 황 형님도 그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지· 하지만 그보다는 자네에 대한 자부심이 더 컸네· 술만 마시면 늘 자네 이야기를 했지· 하도 들었더니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네·”
“그랬나요?”
“요 앞에 있는 현월객잔에서 술을 자주 마셨네· 술만 마시면 늘 똑같은 이야기였지·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조카가 있다고· 그가 언제고 다시 가문을 우뚝 일으켜 세울 거라고 말하곤 했네·”
“황숙은 늘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못 됩니다·”
“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어쨌거나 황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기대해 보겠네·”
진무원의 생각 이상으로 황철은 수문무사와 친했던 모양이다· 수문무사의 목소리에는 황철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득 진무원의 시선에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빈 짐마차 이십여 대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이 그 위에 짐을 싣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보표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눈을 부라리고 있는 모습이 마차에 싣는 물건이 보통 귀한 것이 아닌 듯싶었다·
“큰 상행이라도 나가는 모양입니다·”
“노마님의 특별 지시로 꾸려지는 원행이라네· 자세한 내용은 나도 알지 못하네·”
수문무사의 말에 진무원이 눈을 빛냈다·
경계를 서고 있는 보표들의 수준이 범상치 않았다· 눈에서 정광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백룡상단에서도 정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수문무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 왔네·”
고개를 돌리니 커다란 연무장이 보였다· 연무장에서는 보표들이 땀을 흘리며 무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수문무사가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한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였다· 그러자 우두머리남자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진무원에게 다가왔다·
“황 보표의 조카라고? 난 공진성이라고 하네· 이곳에 있는 보표들을 이끌고 있지·”
“진무원이라고 합니다·”
진무원이 포권을 취했다·
“앉게· 문정이는 잠시 후에 돌아올 테니 이야기나 나누세·”
공진성이 나무 그늘 아래 앉길 권했다· 진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게· 나는 이만 가볼 테니·”
“감사합니다·”
수문무사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공진성이 입을 열었다·
“황 보표의 행방 때문에 온 거겠지?”
“그렇습니다·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나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운남에 문제가 생겼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셋째공자와 수호대가 운남으로 갔다는 것이네· 그리고 노마님의 부탁으로 황 보표가 참여했고·”
진무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노마님이란 분은 왜 황숙을 그런 위험한 임무에 합류시킨 겁니까?”
“내가 높으신 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하나 노마님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황 보표를 합류시킨 것은 아닐 것이네· 그분은 무척 생각이 깊고 현명하신 분이지·”
공진성은 노태태를 무척이나 존경하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노태태를 향한 존경의 염이 담겨 있었다·
문득 공진성의 시선이 진무원이 들고 있는 설화로 향했다· 광목천으로 둘둘 동여맸지만 누가 봐도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을 익혔는가?”
“그저 호신할 정도로 익혔습니다·”
“그런가?”
공진성은 진무원의 말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철은 항상 술만 마시면 진무원을 자랑하곤 했다· 그가 말한 생김새와 진무원의 외모는 꼭 닮았다· 그래서 그는 진무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수문무사처럼 진무원의 존재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누구나 침소봉대(針小棒大)하게 마련이다·
술자리에서는 조그만 장점도 과장되게 포장하게 마련이고 평범한 재능의 소년이 엄청난 천재가 되기도 한다· 공진성은 진무원도 그런 경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황철의 조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진무원은 대접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이곳에 보표로 있는 사람들 중 황철에게 술 한 번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황철은 마음이 따스한 사람이었고 타인에게 배려를 할 줄 알았다· 젊은 보표들에게 황철은 친형 같은 존재였다·
“백룡상단에서는 황숙이 실종되었는데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는 겁니까?”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황 보표만 실종된 게 아니네· 셋째공자와 수호대도 감쪽같이 사라졌네· 그야말로 백룡상단이 발칵 뒤집혔지·”
여섯 달 전 운남성으로 떠난 이들의 소식이 끊기자 노태태는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무인들을 세 번에 걸쳐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 중 돌아온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노태태는 일반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닫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본 상단에는 대단한 무인들이 들어와 있네· 그들과의 교섭이 끝나는 직후 바로 운남으로 출발하게 될 것이네·”
“그럼 아까 본 수레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한 물품들일세· 개중에는 패권회(覇拳會)에 협조를 구하기 위한 물건도 상당수 존재하지·”
현재 운남성 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라면 북천사주의 일인이던 권마(拳魔) 조천우가 세운 패권회였다· 패권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운남성에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백룡상단은 이제껏 패권회와 손을 잡지 않고 독자적인 상로를 개척해 왔다· 자연 패권회의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셋째공자인 윤자명까지 실종된 마당에 독자적인 노선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결국 패권회에 바치는 뇌물인 셈이군요·”
“그런 셈이지·”
공진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천하십대상단 중 하나인 백룡상단이다· 비록 패권회가 대단하다 하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백룡상단이 한 수 위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백룡상단에서 패권회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뇌물을 준비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정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제야 진무원은 백룡상단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백룡상단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 문정이 오는군·”
공진성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한 소년이 뛰어오고 있었다· 바로 곽문정이었다·
“그럼 이야기 나누게나· 말 나온 김에 나는 노태태께 가봐야겠네·”
“혹시 이번 운남행에 저도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허드렛일을 시켜도 좋습니다· 운남에만 갈 수 있다면·”
공진성이 진무원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매우 강렬해서 상단의 그 누구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진무원은 달랐다· 그는 결코 흔들리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진무원의 의지가 눈빛에서 느껴지자 공진성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노태태께 한번 말씀드려 보겠네·”
공진성이 대답과 함께 자리를 뜨고 그 자리를 곽문정이 대신했다· 곽문정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진무원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