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6장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1)
진무원은 담수천과 심원의 등이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부하인 전호대마저 버려두고 도주했다· 그런데도 전호대의 무인들은 악착같이 회혼랑을 막아서며 그들이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그 처절한 모습에 진무원이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호대의 무인들이 한두 명씩 장렬하게 산화해 갔다· 주군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어도 원망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주군을 위해 살고 주군을 위해 죽는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그렇게 살아왔다· 대부분의 강호 명문들은 제자들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시켰다·
어린 시절부터 세뇌 아닌 세뇌를 받은지라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장렬하다 할 수도 있었지만 진무원이 보기엔 그냥 개죽음에 불과했다·
‘주군이 알아주지 않는 죽음에 무슨 영광이 있을 것이고 설령 영광이 있을지라도 죽은 후에 무슨 소용인가?’
진무원의 입술이 뒤틀렸다·
어떠한 오욕을 뒤집어쓰더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오직 끝까지 살아남은 자만이 진실을 말할 자격이 있고 스스로가 정의임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것이 진무원의 강호였다·
그때 은한설의 긴장된 목소리가 진무원의 상념을 깨웠다·
“무원 절대 내 앞으로 나서지 마·”
태무강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와 대지를 박살 낼 듯한 가공할 살기가 어우러져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이런 괴물이····’
담수천 등과의 싸움을 통해 이미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닥뜨린 태무강의 기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렬했다·
진심으로 공포스러웠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에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다·
은한설의 떨림이 이해가 갔다· 이 정도의 괴물이라면 은한설이 아닌 그 누구라도 공포심을 느낄 것이다·
은한설이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태무강이 비웃음을 지었다·
“꼬맹아 결국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구나·”
“혼마 죽지 않는 괴물·”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너희지· 너희가 나를 죽지 않는 괴물로 만들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지·”
혼돈의 괴물이 살기를 드러냈다·
쿠콰콰!
그의 가공할 살기에 대기가 요동을 치고 대지가 진동했다·
은한설이 독문심공인 은혼심결(銀魂心決)을 운용해 태무강의 기세에 맞섰다· 그러자 그녀의 흑옥처럼 새까맣던 눈동자가 은백색으로 물들어갔다·
“음!”
은한설의 몸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기운에 진무원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절반쯤 은백색으로 물든 그녀의 머리칼을 보며 진무원은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전설을 떠올렸다·
어두운 하늘에 푸른 바람이 부니 검은 그림자가 세상에 드리워진다[靑風魔影]·
검은 날개가 펼쳐지니 신창이 빛을 발하는구나[黑翼神槍]·
악마의 도끼가 산을 쪼개니[破山魔斧] 어두운 밤을 밝히며 마녀가 노래하도다[白夜魔女]·
밀야의 절대자 야주(夜主)에게는 네 명의 마장(魔將)이 존재했다· 야주를 대행해 절대적인 무력을 행사하던 대적 불가의 존재들·
청풍마영 흑익신창 파산마부 백야마녀가 바로 그들이다· 밀야와의 전쟁이 한창일 당시 그들의 손에 죽은 자들의 수가 세 자리가 훌쩍 넘어갔다· 그것도 절정 이상의 고수들만 말이다·
오죽했으면 사대마장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금기시됐을까? 운중천의 아홉 하늘조차도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제자는 스승의 명호를 이어받고 명호를 이어받은 제자는 다시 후인을 키워 명호를 물려준다· 그렇게 그들은 불패(不敗) 불괴(不壞)의 공포스러운 명성을 대대로 이어나갔다·
그중 백야마녀의 특징이 바로 은백색의 눈동자였다·
독문 심공인 은혼심결을 대성하면 눈동자가 완벽한 은백색으로 변한다고 했다· 그리고 은혼심결을 대성한 존재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마녀가 된다고 했다·
은한설은 바로 백야마녀의 특징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설이 백야마녀의 후인이던가?’
어쩌면 은한설이 밀야와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가 사대마장 중 하나인 백야마녀의 진전을 이어받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녀의 사부가 백야마녀란 말이군·’
수십 년 전까지도 북천문은 밀야와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그때도 백야마녀는 수많은 무인을 학살했고 그중에는 북천문의 무인도 상당수 속해 있었다·
전대의 인(因)의 실타래가 얽히고설켜 현재의 과(果)로 이어져 있었다·
쩌어엉!
태무강과 은한설이 격돌하며 그 충격파가 진무원을 덮쳤다· 일진광풍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지만 진무원은 석상이라도 된 듯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마신(魔神)처럼 거대한 패력을 뿜어내는 태무강·
은혼기로 무장한 채 그에 대항하는 은한설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이미 태무강은 은한설의 공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한설의 사부를 상대하면서 경험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기운을 은한설과 가장 상극의 공력으로 변환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은한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은혼기로 철벽같은 방어에 치중했다· 일단 자신의 몸에 태무강의 혼원염마기가 침투하면 끝이었다·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없는 은한설은 자연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쾅! 쾅!
“흐윽!”
태무강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은한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은혼기로 방어했지만 내부가 진탕되면서 입에서 선혈이 흘렀다·
처음부터 태무강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차라리 도주를 선택하는 것이 은한설에겐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진무원이 있었다·
아무런 조건도 질문도 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남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한설은 진무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외로움 그의 고독 그의 삶의 무게를·
그녀도 그와 같았으니까·
진무원은 거울에 비친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를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돈 것인지도 몰랐다·
“은혼반선수(銀魂半仙手)·”
은한설의 손에 은백색의 기운이 응축되며 수강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수강이 태무강의 반탄강기를 때렸다·
쩌엉!
순간 태무강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다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 코끼리처럼 은한설을 향해 전진해 왔다·
주르륵!
은한설의 몸이 뒤로 밀리며 바닥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태풍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은한설은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두면 그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는다고? 한설이?’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진무원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은한설이 또다시 튕겨져 나가며 피를 토해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애초부터 태무강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비록 불의의 기습을 당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 강대한 사부조차도 태무강에게 큰 상처를 입고 말았으니까·
현재 은한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버티는 것뿐이었다·
태무강의 파상공세에 은한설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겨났다· 이마가 깨져 피가 흐르고 어깨에도 상처가 생겨났다· 그 상처를 통해 혼원염마기가 파고들려 했다·
은한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어떻게든 버티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손발은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진무원이 있던 곳을 향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진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갔는가?’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슴이 뻥 뚫린 듯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이 밀려오며 눈물이 절로 나왔다·
‘아!’
은한설은 자신의 감정에 당황했다·
그제야 그녀는 진무원을 향한 자신의 감정이 단순한 동질감 때문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진심으로 진무원을 좋아하고 있던 것이다·
‘무원·’
은한설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버텨야 했다· 자신이 무너지면 다음은 진무원이다· 태무강이 지나간 자리에 생존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자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난 후에는 담수천 등을 추적할 것이다·
태무강의 눈에 어린 광기가 짙어졌다· 끈질기게 대항하는 은한설에게 화가 난 것이다·
팟!
그가 은한설을 향해 거대한 동체를 날렸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날아오는 것 같다· 은한설이 양 손바닥을 내밀어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았다·
촤르륵!
순간 태무강의 몸통이 회전했다·
‘전사력(轉絲力)?’
은한설의 눈이 치떠졌다·
콰콰콱!
강력한 전사력에 의해 그녀의 양손이 튕겨져 나갔다·
무방비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태무강의 거대한 동체가 강타했다·
콰앙!
“아악!”
은한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져 나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허윽!”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으며 진기를 골랐다·
순간적으로 은혼기를 끌어올려 가슴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이번 한 수에 절명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컸다·
온몸의 뼈마디가 다 어긋나서 해체될 것만 같았다·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찔러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찾으며 은한설은 몸을 일으켰다·
“크큭!”
그런 은한설의 모습에 태무강이 괴소를 흘렸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듯했다·
“아직 난 죽지 않았어· 내 주검을 넘기 전에는 그에게 갈 수 없을 거야·”
“그 꼬마는 너를 버리고 도망갔다· 그래도 그를 위해 죽겠다는 것이냐? 어리석구나·”
“그래도 그는 나에게 정을 준 유일한 사람이야·”
태무강의 비웃음에도 은한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