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5장 하늘 위에도 하늘이 존재한다 (4)
소무상의 눈이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듯 붉게 충혈됐다·
“경천 원상·”
이 척박한 곳에서 그를 유난히도 따르던 동생들이다· 중원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누구보다 좋아하던 이들이다·
그런 동생들이 피바다 속에 누워 있다· 태무강과 회혼랑의 습격에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릅뜬 눈과 꽉 쥔 주먹을 본 순간 소무상은 그만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때 소무상의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무상이 벼락처럼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수풀을 헤치고 나오는 장패산의 모습이 보였다·
“조장?”
“부조장?”
소무상을 확인한 장패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소무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무상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유경천과 임원상의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신과 달리 장패산은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조장 어떻게 된 겁니까?”
“보며 몰라? 늑대 같은 새끼들이 습격해 왔잖아·”
“내 말은 왜 조장만 이리 멀쩡하냔 말입니다· 이 새끼들은 다 죽었는데 어떻게 조장만····”
“뭐야? 그럼 부조장은 내가 이 새끼들하고 같이 죽었어야 한단 말이야?”
장패산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오줌을 누러 근처 수풀로 들어간 사이 회혼랑이 습격해 왔다· 유경천과 임원상은 최근 익히기 시작한 혈파도법으로 대항했지만 회혼랑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장패산은 행여나 들킬세라 숨을 죽인 채 은신했다· 부하들의 복수보다 그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새끼들 복수는 나중에 하면 돼· 일단 내가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렇게 장패산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소무상이 나타난 것을 보고 나서야 겨우 기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장패산은 자신의 그런 행위가 전혀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을 믿고 따르던 애들입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에 목숨까지 걸 놈들입니다· 그럼 당신도 최소한 그에 걸맞은 모습은 보여줘야지 않습니까?”
“지랄하고 있네· 그 새끼들하고 내가 무슨 상관인데? 아 씨발! 나중에 복수해 주면 될 거 아냐!”
장패산의 말에 소무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인성이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쓰레기 같으니·”
“뭐 이 새꺄? 말 다 했어?”
장패산이 불같이 화를 냈지만 소무상은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와 다툴 시간에 한 명이라도 살아남은 자를 구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복수라도 해야 했다·
소무상이 뒤돌아 북천문으로 걸어갔다·
장패산이 그런 소무상의 등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 거기 가면 죽는다고! 뒤진단 말이야! 뒈지면 모든 게 끝이야! 끝이라고!”
소무상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북천문으로 사라지자 장패산이 중얼거렸다·
“개새끼! 혼자 잘난 척하고 있어· 뒈져야 정신 차리지· 그래 새끼야· 난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릴 거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씨발!”
장패산이 독기 어린 시선으로 북천문을 바라봤다·
서문혜령은 전뇌호천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에 따라 그녀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담수천 심원의가 태무강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다·
그녀도 설마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태무강의 무력은 파격적이고 공포스러웠다·
‘이 상태로는 담 공자와 심 공자 모두가 위험하다·’
그녀는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전뇌호천공이라는 희대의 기공까지 더해져 정세를 읽고 판단하는 능력만큼은 가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조부 서문화에게 확실히 배운 게 있다면 바로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나머지에서 최대한 이득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담 공자의 무적 전설에 흠집이 나서는 결코 안 된다·’
담수천은 반드시 세상의 정점에 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완전무결한 전설이 필요했다· 거기엔 단 한 번의 패배도 어떠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서문혜령이 진무원을 힐긋 바라봤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바로 아깝다는 것이다·
진무원은 이용하기에 따라 무궁무진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북천문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후광은 강호의 젊은 무인들의 기치를 하나로 모을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서문혜령 입장에서 보자면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큰 가치를 가지고 있더라도 담수천만큼은 아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담수천이다·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순식간에 서너 개는 떠올랐다· 그녀는 그중에서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고 대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했다·
‘아깝긴 하지만····’
마침내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내린 결정과 미래에 진무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무원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과 강호에 대한 계획이 차근차근 머릿속에서 적립되듯 쌓여갔다·
서문혜령과 진무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자 서문혜령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진 공자와도 같이 이상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할 것 같네요·”
“그게 당신의 결정인가요?”
“미안해요· 강호의 일이란 게 항상 내 마음 같지는 않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문혜령은 하나도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고난 책사였다· 때로는 개인의 감정과 공적인 일을 완벽하게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진무원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핏줄이란 것은 정말 놀라워서 부모의 성향이 그대로 자식에게 전이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서문혜령은 모르겠지만 진무원은 그녀의 모습에서 조부인 서문화의 그림자를 봤다·
북천문이 몰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문화이다· 그런 서문화의 손녀를 믿는다?
진무원이 그 정도 바보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문혜령이 아직 살아서 회혼랑과 싸우고 있는 전호대의 무인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잠시만 버텨줘요·”
그녀가 담수천 등이 싸우고 있는 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치 선녀처럼 옷깃을 나풀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은 묘한 이질감을 풍겼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무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저건?’
그녀가 보보(步步)를 옮길 때마다 깊은 족적이 파이고 이어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안개가 끼고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비가 내렸다· 낙뢰가 치고 천둥이 울부짖었다·
‘진··· 법(陣法)인가?’
천리(天理)와 지학(地學)에 통달하고 천지간의 기운을 읽을 줄 아는 극소수의 천재만이 펼칠 수 있는 영역의 학문이 바로 진법이다·
제대로 된 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의 기를 끌어모을 수 있는 지형이나 매개체가 필요했다· 진법을 펼치기 위한 매개체는 수백 수천 개로 나뉠 수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런 매개체를 가지고도 엄청난 노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직 걷는 것만으로 진법을 펼칠 수 있는 희대의 기공이 하나 있다·
바로 서문세가의 호형포천보(虎形包天步)이다·
대호의 당당한 걸음으로 바닥에 깊은 족적을 새김으로써 하늘을 가둔다·
서문세가 수백 년의 역사와 지혜가 집약된 이 호형포천보는 이제까지 단 한 명 오직 서문화만이 펼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단 서른 걸음으로 호형포천보를 완성할 수 있는데 일단 한번 펼쳐지면 포천이란 단어처럼 하늘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다·
서문혜령은 서문화처럼 서른 걸음 안에 진법을 펼칠 수도 없었고 하늘을 가둘 만큼 엄청난 위력도 낼 수 없었다·
그녀의 호형포천보는 기껏해야 감각을 왜곡하는 수준이었고 환영진 정도의 위력만 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담수천과 심원의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태무강이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서문혜령이 담수천을 부축했다·
“담 공자·”
“서문 소저·”
“상황이 좋지 않아요· 자리를 피해야 해요·”
“그럴 수는 없소·”
담수천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태무강의 혼원염마기에 내부가 엉망이 되었지만 그의 투혼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상황이 조금 불리하다고 아프다고 물러서다 보면 영원히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는 뼛속까지 천생 무인이었다· 그의 자존심이 이대로 물러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서문혜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뭐가····”
담수천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등 뒤에서 심원의가 수혈을 짚은 것이다· 그가 담수천을 들쳐 업었다·
심원의는 담수천과 달랐다·
그도 굴욕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물러서지 않으면 나중에는 재기할 기회조차 없을 거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심원의가 은한설 뒤에 서 있는 진무원을 바라봤다·
“그는?”
“버려야죠·”
“훗! 냉정하군·”
“어차피 이쪽에서 이용할 수 있는 패가 아니란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이제부터는 그의 운명이에요· 우리완 더 이상 상관없어요·”
서문혜령은 이미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그리는 미래에 진무원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대신 신경이 쓰이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은한설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백야마녀의 후인일지 모른다· 과거 백야마녀가 무공을 펼칠 때면 눈동자가 은백색으로 변한다고 했다·
정말 그녀가 백야마녀의 진전을 이었다면 밀야 역시 어디선가 명맥을 잇고 있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은한설을 붙잡아 진실을 알아내고 싶었다·
‘허나 아쉬워도 포기하는 수밖에····’
태무강이란 괴물의 목표는 은한설이었다· 태무강과 은한설의 눈빛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태무강이 먹이로 점찍은 이상 그녀 역시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저 괴물이 금방 진법을 빠져나올 거예요· 그전에 이곳을 떠나야 해요·”
“알았다·”
두 사람이 각각 담수천과 심수아를 안고 북천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 직후 태무강이 서문혜령의 진법을 파괴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크으으!”
잠시 동안이나마 갇혀 있던 것이 그의 살심을 증폭시킨 듯 가공할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태무강의 시선이 은한설과 진무원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