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4장 혼돈의 바람이 북쪽 하늘을 뒤덮으니······ (2)
창룡회의 출범을 하늘에 고한 담수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반면 심원의는 기분이 좋은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서문혜령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진무원의 옆에 앉아 있던 은한설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보 같아·”
“뭐가?”
“그냥··· 다·”
은한설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일련의 행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강호는 그녀가 살아가는 세계는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쟁취하고 영광을 누리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 그곳에 하늘의 뜻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에 제를 올리고 허락을 구하는 행위 자체가 위선이었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가식적인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하!”
진무원도 웃었다· 그 역시 은한설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공증인이지 지금까지 그들의 행동은 그를 허수아비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보들·”
“맞아· 다 바보들이지· 하지만 무서운 바보들이지· 앞으로의 강호는 저들에 의해 좌우될 테니까·”
“그래서 무서워?”
“조금은·”
“무서워할 필요 없어·”
“응?”
“내가 옆에 있는 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지켜줄 테니까·”
뜻밖의 말에 진무원이 은한설을 바라봤다· 무의식중에 말을 해놓고도 민망했는지 은한설이 얼굴을 살짝 붉히고 있다· 그 모습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
“진심이야·”
은한설마저 없었다면 지금의 상황에 얼마나 비참하고 외로웠을까?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할 정도이다·
그때 담수천이 다가왔다·
“따로 이야기하고 싶소만····”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휘영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한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조용히 옆자리에 앉는 인영이 있었다· 서문혜령이었다·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 소저·”
“····”
“어떻게 음식은 마음에 드나요?”
은한설이 서문혜령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무슨 말씀인가요?”
“얼마나 그를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지?”
“····”
순간 서문혜령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이런 자리에 꼭 그를 부를 필요가 없었잖아·”
“말씀드렸다시피 우린 공증인이 필요했어요· 만일 진 공자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그 점은 사과할게요·”
“누구 생각이야?”
“그게 무슨 말인가요?”
“누가 처음 이런 생각을 했냔 말이야·”
“은 소저·”
은한설의 다소 공격적인 말투에 서문혜령이 당황했는지 얼굴이 벌게졌다· 그때 심수아가 다가와 서문혜령 곁에 섰다·
“언니·”
심수아와 은한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은한설은 심수아의 시선에서 불편한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적의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이 소녀는 은밀한 적대감을 담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무것도 아냐·”
서문혜령이 얼버무렸지만 심수아는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듯 은한설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에 은한설의 미간에 골이 살짝 파였다·
이제까지 꼭꼭 억눌러 온 살심이 폭발하려 했다·
단순히 눈앞에 있는 두 여자가 신경을 건드려서가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를 지배하는 공기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대라는 명목 아래 멀쩡한 사람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는 그녀가 가장 경멸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은한설이 경고했다·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마· 당신들이 아니어도 그는 충분히 고달픈 삶을 살고 있으니까·”
“지금 누가 누구를 괴롭힌단 말이죠?”
서문혜령 대신 심수아가 끼어들었다·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 보니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 같네요· 그는 가만히 있는데 당신이 뭐라고 나서나요? 친척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나설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는 법이에요·”
“아매·”
당황한 서문혜령이 말렸지만 한번 말문이 터진 심수아는 매섭게 은한설을 쏘아붙였다·
“그쪽도 우리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객이잖아요· 너무 주제넘다 생각하지 않으세요? 때로는 호의가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야죠·”
“아매 그만해·”
보다 못한 서문혜령이 심수아를 말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미 최악으로 치달은 후였다·
휘영전 안에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문득 은한설이 몸을 떨었다· 갑작스레 오한이 느껴졌다· 그리고 신경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
‘설마?’
휘영전 밖으로 나온 진무원이 담수천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과하고 싶기도 하고 제안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 따로 불렀소·”
“····”
“먼저 진 형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공증인으로 모신 것은 사과하겠소· 그리고 아까 진 형의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그렇다’요· 내가 북천문의 유지를 잇고 싶소·”
담수천이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대부분의 사람은 북천문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특히 현 강호의 명숙이란 자들 대부분은 북천문의 가치를 폄훼하기 일쑤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힘과 명성을 가진 북천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무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직도 북천문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 투쟁의 역사를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북천문의 유지를 잇는다는 것은 젊은 무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강호들은 젊은 무인들을 햇병아리라 무시하지만 담수천의 생각은 달랐다· 젊은 무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고착화되어 있는 현 강호의 균형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친 것처럼 멸문한 북천문을 이용해 새로운 강호를 여는 것이 담수천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진무원의 묵인이 있어야 했다· 어쨌거나 그는 북천문의 정통을 이은 마지막 후계자이니까· 진무원의 지지를 받을 수만 있다면 담수천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것이 담수천과 심원의 등이 애써 진무원을 공증인으로 부른 이유였다·
담수천에게는 원대한 야망의 시작이었지만 진무원에겐 굴욕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원에서 북천문의 유지를 잇는다? 좋군요· 하나 과연 중원의 명숙들이 그렇게 놔둘까요?”
“그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소·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대단하군요·”
진무원이 피식 웃었다·
딱히 비웃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 순간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패배라곤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남자의 원대한 야망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진 형에겐 언짢은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탁하겠소·”
“····”
“창룡회로 들어오시오· 우리 같이 세상을 바꿔봅시다·”
담수천이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박인 억세고 강한 손이다· 담수천의 말대로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은 주먹이다·
그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을 잡는 순간 앞길이 열리며 탄탄대로를 달리게 될 것이다·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진무원은 고개를 저어 그의 유혹을 뿌리쳤다·
“공증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요· 이 이상 얽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습니다·”
진무원의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담수천이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진무원은 활화산 같은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패천안이라 불릴 만큼 강렬한 담수천의 눈빛이다· 절정의 무인들도 담수천의 패천안을 마주하면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들과 달랐다·
언뜻 담담해 보이는 눈빛이지만 패천안에도 기죽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북천문의 불굴의 정신은 그의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나의 앞길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될지도····’
너무 강렬해서 마치 현실로 전개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에 전신이 다 욱신거렸다· 이런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담수천은 진무원을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했다·
“내가 무례했구려· 당신도 나와 같은 부류· 누구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닌 것을·”
담수천이 진무원을 인정했다·
간혹 친구보다는 적으로 존재할 때 더욱 그 가치가 빛나는 사람이 있다· 담수천은 진무원이 그런 부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쾅!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북천문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안색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