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2장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1)
북천문에 들어온 담수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커다란 나무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는 것이었다· 하인들이 모든 준비를 끝마치자 담수천이 들어왔다·
담수천이 옷을 벗자 강철처럼 단련된 그의 나신이 드러났다· 마치 초원을 거침없이 내닫는 야생마처럼 탄력 있는 근육 위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종횡으로 나 있었다·
백인비무행의 흔적이다· 그의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의 역사가 더해졌다· 혈포인들과의 싸움이 또 다른 흔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혈포인들의 검이 꽂힌 자리에 시뻘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숨이 끊어졌을 만큼 치명적인 상처였다· 급한 대로 혈도를 막아 응급조치를 했지만 한시라도 빨리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했다·
“크으!”
담수천은 심원의에게서 얻어온 독주를 그 자리에서 모조리 마셔 버렸다· 순식간에 한 병을 모조리 마신 담수천이 물속에 몸을 담갔다·
딱지도 생기지 않은 상처에 물이 닿자 마치 소금을 뿌린 것처럼 쓰리고 아파왔지만 담수천은 눈썹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가 목까지 물에 담근 채 운공을 하기 시작했다·
치이익!
순식간에 물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수증기가 피어났다· 수증기 속에서 담수천은 운공을 계속했다·
그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독주를 마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탓에 혈관이 평소보다 배 이상 확장되고 그로 인해 혈액이 순환하는 속도도 몇 배나 더 빨라졌다·
몸 안의 대맥은 물론이고 세맥 말단의 미세 혈맥까지 모조리 확장되었고 그 사이로 담수천의 가공할 공력이 휘돌면서 대사 활동 또한 몇 배나 빨라졌다·
잠력이 폭발하면서 자가회복력 또한 증가했다· 거기에다 담수천의 가공할 공력까지 더해졌다· 신체 복원력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담수천의 전신 모공이 활짝 열렸다· 몸 안의 노폐물이 땀과 함께 배출되면서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언뜻 보면 원시적인 방법 같지만 사실은 수 대에 걸친 경험의 소산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었다· 담수천은 어지간한 영약을 복용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빨리 회복된다는 것을 익히 경험해 알고 있었다·
거기다 그의 독문 내공인 성광기(星光氣)가 더해지면서 그의 자가회복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시뻘겋게 속살을 드러냈던 상처 사이로 노란 진물이 흘러나오고 뒤를 이어 선홍색의 피가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딱지가 내려앉았다·
“후우!”
물속에 들어가 운공한 지 딱 한 시진 만에 담수천이 눈을 떴다·
촤아악!
그가 몸을 일으키자 검게 변한 욕조물이 요동을 치며 넘쳐흘렀다· 담수천은 하인을 불러 나무통에 다시 깨끗한 물을 담게 했다· 그 후로도 담수천은 세 번을 더 물을 갈면서 운공을 했다·
그가 마지막 운공을 끝냈을 때 욕조의 물은 더 이상 더러워지거나 악취가 풍기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끝마친 담수천의 얼굴은 평소의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담수천이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최상은 아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며칠 푹 쉬면 원래의 몸 상태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가공할 정도의 회복력이었지만 담수천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무공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가 익힌 무공은 달랐다· 수 세대 동안 보완되고 발전해 온 그가 익힌 무공은 인체가 가진 본연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데 그 요체가 있었다· 그 때문에 타 유파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들이 가능했다·
담수천은 그제야 새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나왔군·”
심원의 등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몸은 좀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소·”
서문혜령의 물음에 담수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설마 추혼검객(追魂劍客) 백성원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입은 건가요?”
추혼검객 백성원은 천산검문의 소문주로 담수천이 행한 백인비무행의 마지막 상대였다·
담수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추혼일광검공(追魂一光劍功)은 실로 무서웠소· 하지만 나에게 그 정도의 상처를 입힐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았소·”
“그럼?”
담수천은 은염귀와 은귀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싸웠던 혈포인들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심원의와 서문혜령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인가요? 그들이 담 공자에게 상처를 입힐 만큼 대단했나요?”
“그렇소·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승부를 걸지 않았다면 아마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요·”
“으음!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
현 강호에서 그보다 담수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아는 담수천은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였다·
뛰어난 무공 습득력에 상황을 판단하는 통찰력 그리고 승부에 대한 뛰어난 감각은 그 오만한 심원의조차 감히 따라갈 수 없다고 인정하는 바이다·
“그들의 정체는 알아냈는가?”
“신분을 짐작할 만한 그 어떤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무공은?”
담수천이 고개를 저었다·
심원의와 서문혜령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비록 나이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담수천은 산전수전 다 겪은 무인이다· 또래의 애송이들과는 경험의 깊이가 다르다·
그런 그가 상대한 무인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제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허투루 넘길 문제는 아니군· 중원으로 돌아가면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혹시····”
서문혜령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망설였다· 그러자 심원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아닐 거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지 수십 년이 넘었으니까·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면 운중천에서 모를 리 없어·”
“하지만····”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그 이름에 심원의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심각한지 서문혜령은 더 이상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담수천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현 강호를 흔들어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좋다는 말입니다·”
담수천의 눈이 빛났다·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새벽빛처럼 그렇게 강한 빛을 흩뿌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과 영매는 내가 왜 백인비무행을 행했는지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으음!”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현 강호를 지배하는 운중천을 이루는 주축 세력은 모두 아홉 곳이고 그들의 수장이 운중천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아홉 하늘이라 불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운중천을 가리켜 구중천이라고도 불렀다·
지난 백 년 동안 강호는 운중천을 중심으로 지배 구조가 재편되었다· 어떤 세력도 어떤 무인도 운중천의 비호를 벗어나서는 활동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전통의 명가나 기존의 세력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신흥 세력이나 젊은 무인들이 그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때문에 현 강호에서 젊은 무인들은 거의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변혁을 원하는 자는 많았지만 공고히 형성된 그들만의 질서는 결코 깨질 줄 몰랐다· 밀야가 사라진 이후 그 누구도 감히 운중천의 아성에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것은 담수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희대의 천재라 불리는 그였지만 현 강호에서 그의 위치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강호를 흔들어야 했다·
기존의 질서가 송두리째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 ☆ ☆
덜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험로를 지나고 있었다· 어떤 장신구도 없이 소박한 마차의 마부석에는 죽립을 깊숙이 눌러쓴 남자가 고삐를 잡고 말을 몰고 있었다·
남자는 연녹색 유삼을 입고 있었는데 허리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패검을 차고 있었다·
남자는 마차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가 한 번씩 고개를 떨굴 때마다 머리에 쓴 죽립이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위태하게 흔들거렸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말은 마부의 뜻과 상관없이 뚜벅뚜벅 마차를 끌고 갔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마부가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봤다·
순간 죽립 사이로 강렬한 안광이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왔는가?”
마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포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 역시 마부와 마찬가지로 죽립을 눌러쓰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마차를 향해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주군!”
마부는 대답 대신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마차 안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추월인가?”
어떤 감정도 억양의 고저도 없는 목소리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남자인 것 같기도 하고 여자의 음성인 것 같기도 한 음성이다·
백포남자가 부복을 했다·
“다녀왔습니다 주군·”
“찾았는가?”
“찾았습니다· 한데····”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목표가 있는 곳이 하필 북천문입니다·”
“북천문?”
마차 안에서 침묵이 흘렀다· 마부는 물론이고 백포인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잠시 후 마차 안에서 다시 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을 뛰어넘는군· 제법 영악한 선택을 했어· 누구도 그곳으로 숨어들어 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꽤나 곤혹스러운 듯했다· 그에 마부가 입을 열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하고 오지요·”
“아니야· 자네가 가면 필히 흔적이 남아·”
“하나····”
“자네가 갈 일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마부는 이내 입을 닫았다· 그의 주인은 절대 입 밖으로 낸 말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아니라고 결정했다면 마부가 어떤 말을 하던 결과가 바뀌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때 부복하고 있던 백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문제가 또 있습니다·”
“또?”
“담수천 일행이 그곳에 있습니다·”
“창천고성이? 백인비무행을 끝내고 그곳으로 간 것인가?”
“은귀대와 혈영삼마(血影三魔)가 그에게 당했습니다·”
“은귀대는 어쩌다가 그와 충돌했지?”
“우연히 마주친 모양입니다· 혈영삼마는 은귀대를 죽인 자를 추적하다 마주친 것으로 짐작됩니다·”
“흠!”
잠시 목소리가 끊기고 손가락으로 나무를 톡톡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목소리 주인의 침묵이 좀 더 길어지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혼마(混魔)에게 연통을 넣게·”
“혼마를 움직이시렵니까?”
뜻밖의 말에 마부도 놀란 듯했다·
“그라면 알아서 잘 정리할 수 있을 게야·”
“하오나 그리되면 담수천과····”
“창천의 고성도 이제는 하늘이 높은 줄 알 때가 되었어·”
“알겠습니다· 혼마를 움직이겠습니다·”
부복한 백포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주인이 한 말이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주인의 말이 끝나자 마부가 다시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포인은 부복한 채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커다란 깃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여 대의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이 호위하고 있는 상단이었다·
백포인의 주인을 태운 마차는 원래 한 무리인 듯 자연스럽게 상단의 후미에 합류해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