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 1장 용과 호랑이가 한 곳에 모이니······ (1)
운명이란 참으로 묘해서 원하지 않는 순간에
원하지 않는 대상이
가장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치 악몽처럼···
은한설의 몸은 은백색의 운무에 휩싸여 있었다· 운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령의 도움으로 혈혈화혼독을 몰아낸 이후 그녀는 본신의 내력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었다·
은한설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은백색의 운무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일렁이며 그녀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파팟! 파팟!
빠르게 회전하는 은백색의 운무에 닿은 가구와 집기들이 순식간에 먼지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은한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운공에만 집중했다·
어느새 잡티 하나 없이 고운 그녀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땀방울이 목을 타고 가슴 어림으로 흘러내렸지만 은한설의 표정은 고요하기만 했다·
우웅!
운공이 최고조에 달하자 은백색의 운무도 더욱 짙어지고 회전 또한 빨라졌다· 마치 외부의 그 어떤 침입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이 은백색 운무는 더욱더 위세를 떨쳤다·
초저녁에 시작된 은한설의 운공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은한설의 몸을 감싼 채 회전하던 은백색의 운무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 위로 모이더니 코를 통해 흡수되었다·
“후우!”
그제야 은한설이 나직이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수정처럼 맑고 깨끗한 빛이 그녀의 눈에 일렁이다 사라지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은한설이 몸 상태를 점검했다·
근육 한 올 한 올에 탄력이 넘쳐흘렀다· 충만한 내력은 그녀의 혈도를 타고 막힘없이 치달리고 있었다· 온몸에서 활력이 넘치는 것이 몸 상태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몸 상태가 회복됨에 따라 그녀는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머지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엉망이 된 실내의 모습이 말해주듯 그녀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사령은 바깥 사정을 살피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다시 북천문으로 돌아올 때가 바로 그녀가 북천문을 떠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작별할 시간이 멀지 않았다·
은한설은 간단히 씻은 후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진무원이 있는 만영탑이었다·
폐허 같은 북천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만영탑에 새벽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북천문이 아직 죽지 않았다고 웅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은한설은 북천문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생각했다· 그저 마지막 한줄기 숨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죽어가는 거인 천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녀 역시 진무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결코 이대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다·’
그녀가 본 진무원은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잡기 위해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준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세상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 굉장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이제 습관이 되었구나·’
운공이 끝나면 만영탑으로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같이 식사를 하고 그가 끓여주는 차를 마시는 것이 그녀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세상 고민 다 잊어버리고 왠지 모를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처음엔 그런 자신의 감정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잘 키워진 병기였다· 병기에게는 인간의 감정이 필요치 않았고 은한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무원은 그녀를 서서히 변화시켰다· 그와 같이 있다 보면 어느새 무방비 상태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따뜻한 느낌에 오늘도 그녀는 또다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문득 은한설이 걸음을 멈췄다· 만영탑으로 가는 길목에 누군가 서 있었다· 아침 해를 마주 받아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은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은한설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파였다·
‘서문혜령·’
아침 햇살보다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은 바로 서문혜령이었다· 그녀가 우두커니 서서 만영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한설의 기척을 느꼈는지 서문혜령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서문혜령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혜지가 느껴지는 맑은 눈동자에 은한설의 모습이 맺혔다·
서문혜령이 포권을 취했다·
“은 소저·”
“····”
은한설이 말없이 포권을 취했다· 그러자 서문혜령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산책을 하시나 보네요·”
“밥·”
“네?”
“밥 먹으러 가·”
예상치 못한 은한설의 대답에 서문혜령이 잠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본래의 표정을 회복했다·
“진 공자와 같이 식사하시나 보죠?”
은한설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혜령이 그런 은한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려진 것은 은한설이라는 이름 석 자뿐 그 외는 모든 것이 불분명·’
진무원은 그녀가 먼 친척이라고 했다· 지금도 심원의의 수하들이 은한설의 내력을 알아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알아낸 것이 없었다·
“진 공자는 좀 어떤가요?”
“그쪽도 알고 있지 않나?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당사자와 함께 있으니·”
은한설의 날 선 대답에 서문혜령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점은 거듭 사과드릴게요· 심 공자가 그리 행동할 줄은 저도 예상을 하지 못했어요·”
“흥!”
서문혜령의 사과에 은한설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은한설의 태도에 화가 날 만도 하건만 서문혜령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한설보다 불과 두어 살이 더 많을 뿐인데 서문혜령은 성숙한 여인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은한설은 그런 서문혜령의 분위기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와 한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마치 골이 난 사람처럼 은한설의 양 볼이 퉁퉁 부어올랐다·
서문혜령이 그런 은한설이 귀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은 소저는 형제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건 왜 묻지?”
“그냥 궁금해서요·”
은한설이 반말을 해도 서문혜령의 눈에는 그조차 귀엽게 보이는 듯했다·
“혼자야·”
“그럼 부모님은?”
“없어·”
“미안해요·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서문혜령이 재빨리 사과를 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은한설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문혜령이 재빨리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우리 언제 차 한 잔 해요·”
그러자 은한설이 서문혜령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마치 ‘왜?’냐고 묻는 듯했다·
서문혜령이 배시시 웃었다·
“안 될까요?”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다· 결국 은한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음에·”
“약속한 거예요?”
“약속했어·”
“기다릴게요·”
대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만영탑 앞에 도착했다·
은한설이 서문혜령을 바라보았다·
“같이 갈 거야?”
“아니에요·”
서문혜령이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은한설은 잠시 서문혜령을 바라보다가 만영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문혜령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은한설이 만영탑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