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9장 산을 밀고 바다를 퍼내서라도 시대를 움직인다 (2)
소무상은 후원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딱지가 앉은 상처가 다시 터지면서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그는 마치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검풍이 먼지바람을 일으키고 검사가 일어났다·
‘거짓말이다· 놈의 간교한 거짓말이야·’
소무상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엽월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박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소무상은 가슴에 쌓인 울화를 풀기 위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내기가 멋대로 요동치면서 혈맥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가슴에 쌓인 울화를 풀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엽월의 재능은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소무상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그에게 뒤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와 똑같은 무공을 익혔다면 그와 비슷한 기회만 주어졌다면 결코 그에게 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혈이 미친 듯이 들끓어 올랐다·
슈악!
부러진 검에서 나온 검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내공이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진원지기까지 손상을 입을 수 있었다· 진원지기가 자칫 손상되기라도 하면 무인으로서의 삶도 끝나게 된다· 그런데도 소무상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소무상은 심마(心魔)에 빠져 있었다· 엽월과의 싸움이 그의 마음에 마귀가 자라나게 만든 것이다·
‘죽인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격렬한 살의가 이 순간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엽월을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을 배신한 그녀를 죽일 수 있다면·
“크으으!”
그가 짐승의 울음을 흘리며 후원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스스로를 의심할 때 마음속에서는 마귀가 자라난다· 분노는 스스로를 불태울 뿐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이다·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나의 또 다른 일면일 뿐 온전한 내가 아니다· 뜨거운 마음을 가라앉히면 명경지수가 되니 그것은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 될지어다·”
갑자기 누군가의 나직한 읊조림이 들려왔다·
고막을 파고드는 낯선 음성에 소무상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오직 심마만이 가득하던 그의 가슴에 한줄기 파문이 일어났다·
혼탁함만이 가득하던 소무상의 눈에 조금씩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낯선 음성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물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햇볕은 물을 허공으로 띄워 올리니 마음의 움직임도 이와 같으니라· 구름이 움직이고 바람이 부는 것은 마음의 이치와도 같다·”
순간 소무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들려오고 있는 것이 그가 그토록 간절히 갈구하던 구절이라는 사실을·
어떤 이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소음에 불과하겠지만 그에게는 청운검법의 부족한 부분을 절묘하게 보완해 주는 단물과도 같았다·
소무상은 정신없이 미지의 음성이 전해주는 구결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미친 듯이 폭주하던 내기가 서서히 안정을 찾더니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기해(氣海)를 바다로 삼고 신궐(神闕)을 줄기로 삼으리라· 하늘을 떠받드는 천주(天柱)여 백회(百會)를 우주로 통하게 하라·”
소무상의 기가 낯선 음성이 가르쳐 주는 대로 움직였다·
쿠우우!
순식간에 막혀 있던 혈맥이 뚫리면서 내기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하지만 소무상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내기가 움직이는 것을 관조했다·
청운심법만으로는 죽어도 움직이지 않던 기운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좁은 부분은 뚫고 지나가고 막힌 부분은 우회하면서 새로운 혈로를 개척하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청운심법이구나· 청운검법에 맞는 최적의 심법·’
그제야 소무상은 자신이 어떠한 상태였는지 깨달았다·
그는 백척간두(百尺竿頭)의 경지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즉 청운검법으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던 것이다· 청운심법으로 익힌 내공 역시 최고조에 달해 있었지만 상위 경지로 오르는 관문을 찾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소무상의 기가 움직이기 가장 최적의 경로로 유도했다· 마치 조그만 개울가로 흐르던 물이 폭 넓은 강으로 모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기가 움직이고 있었다·
일주천 이주천 마지막 삼주천까지 이뤘을 때 소무상은 눈을 떴다· 순간 강렬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가 서서히 갈무리되며 본래의 안광을 찾았다·
소무상은 부러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기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쉬잉!
선명한 검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소무상은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동이 터왔다· 그제야 소무상은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마치 몸 안에 수은이 흐르는 것처럼 쾌척하기 그지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다·
그제야 의문이 들었다· 심마에 빠진 자신을 구원해 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이다·
그는 내공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사라졌는지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왠지 귀에 익으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소무상은 자신의 주위에 그런 목소리를 가진 자가 있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설마··· 아니겠지?”
☆ ☆ ☆
진무원은 눈을 감은 채 공방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직접 만든 의자는 조악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체형에 딱 맞아 무척이나 편안했다·
진무원은 자신이 사용할 검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영탑 지하에서 매일같이 검을 휘둘렀다· 공방에서 매일같이 검을 만들었다· 손에는 굳은살이 박이고 손가락 마디는 마치 대나무처럼 길쭉하면서도 굵어졌다· 검을 잡기 적합하게 손 모양이 변한 것이다·
체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으로 검을 익히면서 그의 몸 역시 검을 펼치기 적합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비록 한눈에 띌 정도로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제법 탄탄한 체형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무원은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검을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체형을 생각해 두고 그에 맞춰 조금씩 단련해 가는 것이다·
마치 망치질로 놋그릇을 넓혀가듯 진무원 역시 그렇게 조금씩 착실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지난하고 힘든 작업이었다· 운중천의 감시를 피해야 하는 일이기에 더욱 힘들고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자신을 위한 검을 만드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검은 육체가 성장을 끝낸 뒤 만들어도 늦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최고조의 성장에 달했을 때 그에 맞춰 검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를 착실히 해야 했다·
“결국 이 또한 인내심과의 싸움이군·”
결정적인 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또 준비한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고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생각을 모두 정리한 진무원이 눈을 떴다·
진무원은 공방 한쪽으로 다가갔다· 이제껏 만들었다 부순 검편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구할 수 있는 철괴가 한정되어 있기에 재사용을 해야 했다· 진무원은 검편을 모아 화로에 집어넣었다·
불길이 파랗게 타오르며 강렬한 열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강렬한 열기에 폐가 타버릴 듯해서 한 식경도 버티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얼굴이 벌게지기는커녕 땀방울도 거의 흘리지 않게 되었다·
진무원은 언제부턴가 자신이 피부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강렬한 열기에 적응하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진무원은 이것 역시 만영결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역대 북천문주가 만들어낸 이 심법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진무원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쳐 가는 개척자였다· 지금은 방향 잡을 등불조차 없는 미로 같은 동굴 한가운데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걷는다면 언젠가 환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무원은 쇳덩이를 화로에서 꺼냈다· 뜨겁게 달아오른 쇳덩이에서는 가공할 열기가 느껴졌다·
진무원은 망치로 쇳덩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가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며 쇳덩이가 일그러졌다·
따당땅! 땅땅!
그의 망치질은 나름의 운율을 갖고 있어 듣기에 무척 좋았다· 진무원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운율에 취해 한참을 망치를 내려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흠! 망치 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은 줄 오늘 처음 알았군· 인상적이야·”
갑자기 진무원의 무아지경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