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8장 착한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결코 착하지 않다 (2)
“괜찮아?”
“괜찮아·”
“정말이야?”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은한설의 물음에 진무원이 피식 웃었다· 은한설은 그런 진무원의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왜?”
“정말 괜찮은지 보려구·”
“어때 보여?”
“뭐 괜찮은 거 같네·”
은한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양 볼이 부푼 것이 무언가 심사가 단단히 꼬인 모양이다·
“먼저 갈게·”
은한설은 진무원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날려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진무원에게 무공을 익힌 것을 숨기지 않았다·
진무원은 은한설이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꼭 고양이 같았다· 길들여지지 않는·
은한설과 헤어진 진무원이 으슥한 곳에 이르러 갑자기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웩!”
진무원은 노란 위액이 나올 때까지 토하고 또 토했다· 심원의에게서 얻어먹은 음식을 모조리 토하고 난 후에야 진무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좀 개운하군·”
진무원이 입가에 묻은 흔적을 소매로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날이 추운데도 몸에서 열이 올라왔다· 진무원은 멀지않은 우물가로 향했다· 다행히 주위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무원은 걸치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아직 차가운 공기가 그의 살갗을 자극했다·
진무원은 두레박을 내려 우물을 한가득 길어 올리더니 그대로 몸에 뒤집어썼다·
촤하학!
정신이 번쩍 들며 그나마 남아 있던 취기가 싹 날아갔다·
“앞으로 꽤 피곤해질 것 같군·”
진무원을 바라보던 심원의의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는 식사를 하는 내내 진무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 탓에 진무원은 식사를 하는 내내 긴장해야 했다·
심원의는 진무원이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간단한 외공 정도야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만영결을 익힌 것을 들키는 그 순간 심원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무원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진무원이 다시 찬물을 몸에 퍼부었다·
“참아라 진무원·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진무원은 참을 인(忍)이라는 글자를 수도 없이 되뇌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장구름이 끼었는지 하늘에는 그 흔한 별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담수천 그가 이곳에 온단 말이지?’
누가 뭐라고 해도 담수천은 백인비무행을 치르는 이 시대의 기린아였다· 애초에 심원의와 서문혜령 등이 이곳에 온 이유도 담수천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그가 이곳에 옴으로써 강호의 시선도 집중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무원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 ☆ ☆
심원의는 언덕 위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평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한줄기 미소가 떠올라 있다·
“멋지군·”
황량하기만 한 풍경이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끝이 없는 평원과 그 너머 아릿하게 보이는 산의 그림자뿐· 하지만 심원의는 그 속에서 맥동하는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고 있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 지배하지 못하면 지배당하고 약탈하지 못하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곳· 그래서 이곳에서 태어난 모든 것은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
심원의는 그런 북방의 강함을 사랑했다· 그 자신 역시 강자들만의 세상인 사사천에서 태어났기에 강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전호대주 목운평이 심원의를 향해 조용히 다가왔다·
“소주 한참 찾았습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을 뿐이야· 호들갑 떨 것 없어·”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소주는 사사천의 지배자가 되실 존귀한 분이십니다·”
“훗! 천하에 누가 있어 감히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
심원의가 조소를 흘렸다· 그에 목운평이 감히 뭐라 말하지 못하고 고개만 깊숙이 숙였다· 그에 심원의가 다시 북방의 평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 대주도 보이나?”
“예?”
“나는 항상 이곳에 와보길 소원했어· 백년전쟁의 흔적을 보고 싶어서 치열했던 전장의 기록을 내 눈에 담고 싶어서· 그 역사의 시간을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보셨습니까?”
“느끼고는 있지· 그 치열했던 시간의 흔적과 열기를· 그에 비하면 중원은 너무나 평화로워·”
“소주·”
“운중천의 늙어 죽지 않는 괴물들이 만들어낸 허상 같은 세계 그것이 현 강호의 진정한 모습이지·”
심원의의 입매가 뒤틀렸다·
북천문의 처절한 몰락 이후 중원은 평화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운중천이라는 초월적인 단체가 군림하면서 문파 간의 자잘한 분쟁은 자취를 감췄다·
운중천은 개인 간의 다툼이나 분쟁을 용납하지 않았다· 모든 사건이나 분쟁은 운중천의 중재를 통해서 해결해야 했고 그것을 어길 시에는 강력한 제재가 들어갔다·
운중천은 특히 강호를 떠도는 낭인들에게 강력한 제재를 행사했다· 대부분의 소소한 분란이 낭인들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낭인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었고 서로 간의 유대감도 약했다· 당연히 운중천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운중천은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하게 반기를 든 낭인들을 응징했다· 그 결과 많은 낭인들이 검을 꺾거나 다른 문파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나마 구대문파나 오대세가 혹은 북천사주 정도의 존재감과 힘을 가진 단체들만이 운중천에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 그 외의 문파들은 숨을 죽인 채 운중천의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됐다·
대문파들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각종 이권에 개입해 어마어마한 수입을 거둬들였고 그렇게 얻은 강력한 금력을 바탕으로 또다시 세를 확장했다·
무력과 금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인들은 자유를 택하는 대신 이권을 따라 움직였다· 어떻게 보면 밀야와의 전쟁 때보다 더 삭막한 세상이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운중천이 의도한 것이다· 정확히는 운중천을 지배하는 아홉 하늘이 만들어낸 모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체제가 깨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아·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을 거야·”
그만큼 그들은 완벽한 체계를 만들어냈다·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탄탄하면서도 완벽한 지배 구조를 이뤄낸 것이다·
지배하는 소수의 단체와 인물들 그리고 지배를 당하는 대다수 무인의 세상· 그것이 지금의 강호였다·
심원의는 사사천의 소천주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모두 누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온갖 영약을 복용하고 벌모세수를 받아 손쉽게 절정의 성취를 이뤘다·
아마 이변이 없는 한 사사천은 그가 물려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무척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의 아비 심무외는 아직 젊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해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초탈해 보이지만 심무외는 결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놓거나 쉽게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의 자식인 심원의라 할지라도 말이다·
“후후! 내가 사사천을 물려받으려면 아마 수십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하지만 난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어· 여기는 나의 마음을 다지는 전장이다· 이곳에서 나는 새로운 비상을 준비할 것이다·”
심원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아직 젊고 혈기 왕성했다·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몇십 년 동안 소천주로 만족하기에는 야망이 너무나 컸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 대주의 도움이 필요해·”
“전 소주를 위해 준비된 검입니다· 저를 만드신 분은 주군이시지만 사용하시는 분은 바로 소주입니다·”
“그런가?”
심원의가 목운평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목운평은 안구가 터질 듯 아파옴을 느꼈다· 하지만 심원의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에 심원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를 사용하시오소서 소주·”
“그렇다면 호칭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주군!”
“훗!”
그제야 심원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운평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언덕 위에 나타났다· 검은 피풍의를 걸친 사내는 전호대의 일원인 엽월이었다·
“대주!”
엽월이 낮은 목소리로 목운평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저자가 공자님을 꼭 뵙고 싶답니다·”
엽월의 저 멀리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장패산이었다·
목운평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주군을?”
내당도 아니고 외당 그것도 일조도 아닌 삼조다· 실력도 형편없거니와 외당 내의 힘겨루기에서조차 밀린 패배자에 불과하다· 그런 자가 감히 심원의와 독대를 하겠다 하니 절로 살심이 들끓어 올랐다· 하지만 심원의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데려오도록·”
“주군?”
뜻밖의 말에 목운평이 심원의를 바라봤다·
“훗! 쓰레기라고 용도가 없을까?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다 쓸모가 있는 법·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심원의의 명령에 목운평은 두말하지 않고 엽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엽월이 장패산을 데려왔다·
“나를 보고자 했다고?”
“그렇습니다 공자님·”
장패산이 심원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그 모습에 심원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소인 평소에 심 공자님을 흠모했습니다· 제게 공자님을 모실 기회를 한 번만 주시면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흐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장패산이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어대자 피가 흘러내렸다·
“나를 흠모했다?”
“예! 저는 항상 장차 무림을 이끌어 나갈 분은 심 공자님밖에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비록 쓸모없는 몸이지만 심 공자님이 거둬주신다면 충심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거지?”
“필요한 것은 뭐든 할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운중천으로 돌아가면 내부에서의 눈과 귀가 되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운중천에서 나의 눈과 귀가 되겠다? 너는 내가 얼마나 많은 눈과 귀가 있는지 알고 있느냐? 네가 감히 그들에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무 물론 공자님께서는 많은 심복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저만큼 밑바닥에 오래 있던 이는 없을 겁니다· 저는 밑바닥의 인심이 어떻게 변하는지 또한 그것을 활용할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장패산은 인생을 건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인생이 별 볼 일 없이 끝나리란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중원으로 제때 돌아가지 못하고 몇 년을 더 이곳에서 썩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를 도박을 하게 만들었다·
심원의의 심복만 될 수 있다면 운중천에서의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다· 장패산은 바닥에 몸을 붙이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이 심원의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목운평이 심원의에게 속삭였다·
“주군께서 거둘 가치도 없는 자입니다·”
목운평은 경멸의 시선으로 엎드려 있는 장패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뼛속 깊은 곳까지 천생 무인이었다· 그는 장패산의 교활하게 빛나는 눈빛을 보고 그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심원의의 허락이 떨어지면 단숨에 장패산의 목을 벨 수 있도록 검병을 잡고 있었다·
장패산은 자신의 생사와 운명이 갈리는 순간임을 깨달았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결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장패산의 운명이 한순간에 걸렸구나·’
한순간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멀리 왔다· 죽든지 살든지 이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까?”
심원의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장패산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장패산은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참으며 심원의의 대답만 기다렸다·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심원의가 결정을 내렸는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어라·”
“예!”
장패산이 고개를 들자 똑바로 내려다보는 심원의의 얼굴이 보였다· 뱀보다 차갑고 칼날보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위압적인 눈빛에 장패산이 그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좋다 내 너를 거둘 것이다· 중원에 돌아갈 때 너를 데리고 가겠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니 주군·”
“대신 배신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내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거나 딴마음을 먹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절대 충성하겠습니다· 주군께서 시키는 일이라면 지옥불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가봐·”
심원의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장패산이 무릎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엽월이 장패산을 데리고 사라지자 목운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자를 거둘 생각이십니까?”
“흐흐! 가만 생각해 보니 저런 미꾸라지 한 마리쯤은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 말이야· 너무 맑고 깨끗한 연못은 재미없지 않은가? 가끔은 흙탕물도 일어나야 구경하는 맛도 있는 법이지·”
심원의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