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5장 그해, 겨울······ (2)
진무원은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손끝에 느껴지는 목검의 감촉과 무게 균형감을 기억하려 애를 썼다·
‘결국 검은 손의 연장선상· 그렇다면 내 손처럼 느끼고 호흡해야 한다·’
몸뚱이에 덩그러니 손발만 붙여놓았다고 신체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까?
뼈가 지탱하고 근육이 힘을 보태주고 혈관으로 피가 돌아야 비로소 살아 있는 육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신경이 연결되고 뇌와 동조를 이뤄야만 진정한 수족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진무원은 같은 관점에서 생각했다·
검은 단순한 살상 무기가 아니다· 나의 일부분이고 팔의 연결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사고방식과 보는 관점도 다르게 접근해야 했다·
진무원의 생각이 아니라 아비 진관호의 생각이 그랬다·
진관호는 진무원에게 무공을 익히게 하지 않았다· 대신 무리(武理)만큼은 철저하게 가르쳤다·
검을 잡는 기본적인 자세부터 무공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기초적인 것들을 확실히 가르치면서 외우게 했다· 그 탓에 몸으로는 일초반식의 무공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진무원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무공에 대한 상식과 지식이 꽤 많이 들어 있었다·
수많은 무공 중에서 진무원이 가장 끌린 것은 바로 검이었다·
흔히들 검을 가리켜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 부른다·
수많은 병기가 있지만 그중의 으뜸이 바로 검이라는 뜻이다·
파괴력으로 보자면 도를 따를 수 없고 전장에서의 효율성을 따지자면 창에 한참 뒤떨어진다· 기문병기로서의 이점은 편(鞭)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강렬한 위력은 도끼를 결코 따를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검을 만병지왕이라 부른다·
왜 그럴까?
진무원은 그 이유가 검에 통치의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대로부터 지배자들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아닌 군림의 증표로 검을 사용해 왔다· 하다못해 제를 지낼 때도 검을 사용해 천지간의 소통의 통로로 사용했다· 단순한 무기가 아닌 군림하는 자의 의지가 담긴 신물이 바로 검이었다·
최소한 진무원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진무원은 다른 무기가 아닌 검에 가장 끌렸다·
‘삼재검법만 봐도 그렇다· 남들은 단순히 찌르고 베고 가르는 것 정도의 기초적인 검술로만 이해하지만 그 안에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두 다리로 대지를 굳건히 디딘 채 인간이 존재한다· 하늘과 대지 그리고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삼재검법에 담겨 있었다·
때문에 진무원은 검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선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아직 인간에 대한 이해까지는 힘들지만 적어도 자신의 육체와 검의 상관성만큼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응용해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진무원은 검은 훨씬 더 후에 익힐 예정이었다· 만영결을 익혀 그림자 내공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단 그림자 내공을 만든 후 검을 익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었다· 하지만 만영결에 더 이상 진전이 없자 생각을 바꿨다· 진전이 없는 만영결에 대한 돌파구를 검에 대한 기초를 익히면서 찾을 생각인 것이다·
진무원은 삼재검법의 요결에 따라 검을 휘두르며 최적의 자세를 찾아갔다·
검이 살아 숨을 쉬기 위해서는 근육이 받쳐줘야 하고 혈관으로 피가 돌고 신경이 검첨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느껴야 했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검이 곧 나이고 내가 검인 경지· 아직 진무원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지고한 경지였지만 일단 검에 대한 방향만큼은 그렇게 잡은 것이다·
한 번 두 번 검을 휘두를수록 진무원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호흡은 거칠어졌고 그의 자세는 무너져 갔다·
자세가 무너지자 진무원은 검을 놓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아직 근력이 따라주지 못하는구나· 내 마음과 검 사이에 이만큼의 괴리가 있구나·’
진무원은 육체를 단련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동안 만영결을 익히면서 틈틈이 육신을 단련했지만 본격적으로 검을 익히기에는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문제는 장패산 등의 감시를 어떻게 피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비록 예전에 비해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가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히는 낌새를 보이면 분명 운중천에 보고할 것이다·
그가 자유롭게 무공을 익힐 수 있는 공간은 만경각이 전부였다· 하지만 무공을 마음껏 익히기에는 협소했다·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겠군·’
갈 길은 먼데 걸림돌은 너무나 많았다·
시작부터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진무원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일단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해·’
일단 방향은 잡았으니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은 인내심과 지치지 않는 지구력이었다·
‘무엇보다 검을 익히기에 적합한 육체를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쓸데없는 근육과 살은 제거하고 필요한 부분은 발달시켜야 한다·’
진무원의 머릿속에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지향할 점을 분명히 했으니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일만 남았다·
진무원은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만경각에서의 한나절이 벌써 지나간 것이다·
진무원은 습관처럼 발걸음을 옮기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여긴?”
얼마 전까지 그가 지내던 곳 그러니까 지금은 은한설에게 물려준 곳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진무원은 몸에 밴 습관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은한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나갔나 보군·’
진무원은 어제 은한설이 장패산을 제압하던 광경을 떠올렸다· 허를 찌르는 기막힌 움직임과 냉철한 판단력은 분명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의 그것이었다· 명가에서 무공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진무원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간 직후 갑자기 거처 구석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푸른 기가 감도는 흑발의 소녀 바로 은한설이었다·
진무원은 몰랐지만 은한설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검은 돌과 하얀 돌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이형유리진(異形琉璃陣)·
일종의 환영진으로 가장 기초적인 진법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돌 몇 개 가지고 펼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진법은 아니었다·
은한설은 마음 편히 내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일부러 진법을 펼치고 은신했다· 이형유리진이 비록 기초적인 진법이긴 하지만 진법에 조예가 없는 자라면 알아보기도 힘들거니와 파해하기는 더 힘들었다·
그녀는 앞으로도 이형유리진 안에서 내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할 생각이다· 일단 내력만 어느 정도 회복된다면 더욱더 정교한 진법을 펼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안전을 더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은한설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진무원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다시 이형유리진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또다시 눈이 내렸다· 사람의 키만큼이나 높이 쌓인 눈 때문에 북천문은 세상과 완벽히 단절되었다· 기온은 더욱 차가워졌고 두꺼운 옷을 몇 겹이나 껴입어도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눈을 치울 사람이 없었기에 북천문 내부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눈이 쌓였고 그 때문에 전각 사이를 이동하기 위해서 따로 토끼 굴을 파야 할 정도였다·
사정이 그러다 보니 장패산을 비롯한 삼조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거처에 있거나 화천각을 보수하는 데 할애했다·
은한설은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철저히 존재감을 감추고 지냈는데 생필품이 꾸준히 줄어드는 것으로 그녀가 아직도 북천문 내에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쉽게 보기 힘들 거란 사실이다· 때문에 진무원은 그녀에게서 신경을 딱 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진무원은 목검을 든 채 앞을 노려봤다·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암벽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현재 그가 서 있는 곳은 만영탑 가장 깊은 지하였다· 십이 층 높이의 만영탑은 단단한 암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현재 진무원이 노려보는 암벽이 바로 그것이었다·
진무원이 목검을 힘주어 잡더니 암벽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 퍽!
둔중한 소성이 지하에 울려 퍼졌다·
진무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암벽을 내려친 충격인 목검을 잡은 손아귀를 통해 팔꿈치 어깨 등허리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크윽!”
결국 진무원은 목검을 몇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놓고 말았다· 그의 호구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지독한 고통에 진무원이 이를 악물었다·
잠시 고통을 참던 진무원이 겉옷 하단을 찢어 손에 동여맸다· 잠시 손가락을 움직여보던 진무원이 다시 목검을 잡았다·
“후!”
길게 호흡을 고르던 진무원이 다시 암벽을 향해 목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암벽에 최대한의 충격을 주면서도 내 몸은 보호해야 한다·’
진무원은 몸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검을 잡았다· 처음에는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잡았다가 조금 더 부드럽게 잡으며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자세를 찾아갔다·
퍼억!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이 산산이 부서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진무원의 얼굴에도 파편이 스치고 지나가면서 피가 흘러내렸다·
진무원은 노기 어린 시선으로 자신이 목검을 휘두르던 암벽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암벽에는 그가 목검을 휘둘렀다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화가 났다· 자신이 이렇게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싶다·
한편으로는 만영결이라는 무공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왔다· 벌써 삼 년이나 매달렸는데 입문은커녕 내공을 쌓을 어떤 단초도 찾지 못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몰락한 문파의 주인이라는 허울 좋은 명예와 폐허뿐 창공을 비상할 그 어떤 여건도 주어지지 않았다·
진무원은 남아 있던 목검의 손잡이를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으아아!”
진무원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암벽을 노려보며 괴성을 질렀다· 벽에 막힌 그의 절규가 메아리쳐 다시 돌아왔고 또 증폭되었다·
진무원은 한참을 그렇게 소리를 치고 또 쳤다· 그러다가 지쳐 바닥에 누웠다·
시커먼 천장이 망막 가득 들어왔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격렬하게 고동치던 심장이 조금씩 원상태로 돌아갔고 흥분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탈진한 상태로 진무원은 한참이나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겨울은 길고 목검을 만들 나무는 많이 남아 있다· 나에게 남는 것은 시간뿐· 그래 조급해할 필요 없다· 길게 보는 거다· 나의 인생은 이제 시작이니까·’
그렇게 마음먹으니까 고통이 조금씩 가라앉고 분노도 사라졌다· 목검을 쥐었던 손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마음이 조급하지도 않았다·
순간 진무원은 안개로 가득하던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고통도 분노도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사실을·
‘그래 내 마음이 문제였구나· 결국 내 몸은 내 의지를 따라가는 것·’
진무원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파르르 떨렸다·
아건심족(我健心足)·
‘결국 굳은 마음 하나면 족하지 않은가?’
안개로 가득하던 머릿속에 한줄기 빛이 관통하는 듯 시야가 환하게 열리더니 단전 어림에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존일영(我存一影)·
‘그래서 나는 한줄기 그림자로 존재하리라·’
형체는 없으나 분명 존재하고 빛의 반대편에 있으나 어둠은 아니었다·
세상의 이면에 반드시 존재하는 그림자가 진무원의 아랫배에 똬리를 틀었다·
진무원이 만영결에 입문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