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4장 없는 집안에 손님만 는다 (1)
진무원은 눈을 감은 채 북천문 안을 거닐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이나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사실 만영결에 몰두하고 있었다·
‘풍우만천(風雨滿天) 촉화명세(烛火明世) 비바람이 하늘을 가득 채워도 촛불처럼 세상을 밝히리라·’
너무나 추상적인 구절이다·
내공의 운용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의 공부를 말하는 것인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자구만 해석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앞뒤의 흐름을 면밀하게 맞춰봐야 했다· 만영결은 단순한 호흡법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가 담긴 학문이기에·
문득 진무원이 눈을 떴다· 머지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장패산이 조원들과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장패산과 삼조원들은 진무원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려 버린 것이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었다· 감시할 사람도 없고 통제할 사람도 없었다· 어떻게 보내든 삼 년만 보내면 됐다·
밀야의 준동을 감시해야 한다는 생각 따윈 장패산의 뇌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어떻게 해야 하루를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장패산보다 먼저 온 이조원들도 저들과 비슷했다· 그들 역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다가 중원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앞으로 올 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무원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장패산 등에게 당한 손가락이 욱신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원하던 그렇지 않던 삼 년을 같이 보내야 한다· 철저히 속내를 숨기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지내야 했다·
진무원은 장패산 등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한때 북천문의 후원이라 불리던 곳이다· 예전에는 큰 연못을 중심으로 인공 가산과 온갖 기화이초가 잘 가꿔졌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가꾸는 사람이 없어 수풀만 무성할 뿐이다·
진무원이 가끔 타인의 눈을 피해 쉬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었는데 오늘은 그보다 먼저 온 선객이 있었다·
쉬쉭!
누군가 후원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발길에 수풀이 짓이겨지고 그의 손놀림에 풀들이 허리가 잘려 허공에 흩날렸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토해내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남자는 바로 소무상이었다· 언제부터 검을 휘두른 것인지 모르지만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진무원은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소무상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가슴에 쌓인 울분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소무상은 미친 듯이 몸을 놀렸다·
청운검법(靑雲劍法)·
운중천의 하급무사들이 주로 익히는 입문 무공 중 하나이다· 초식이 간결하고 내공심법도 효율이 좋아 비교적 단기간 안에 익히기 편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상승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 있어 일정 이상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상승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상위의 무공을 익혀야 하는데 그런 무공들은 소무상 같은 외당의 하급무사들에게는 지급되지 않았다·
능력을 검증받거나 공을 인정받아 승급이 되어야만 상승의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운중천이었다· 소무상은 불행히도 승급할 수 있는 대상에 속하지 않았다·
아무런 형식도 없이 무작정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진퇴가 확실하면서도 안정적인데다가 눈이 확실히 검의 궤적을 좇아가고 있었다· 재능이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기본은 확실히 갖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바탕 검무를 풀어낸 후 소무상이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챙그랑!
“하아! 빌어먹을!”
그래도 가슴속에 쌓인 울분이 풀리지 않는지 소무상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러다가 진무원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비어 있어 들어왔는데 문제 있나?”
“뭐 딱히· 어차피 빈곳이니까·”
“그럼 문제없겠군·”
소무상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삐딱했다· 진무원을 볼 때마다 아쉬움과 짜증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그런 소무상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소무상이 다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잘려 나간 풀잎이 소용돌이치며 허공에 흩날렸다·
바람이 불어오며 연못에 파문이 일었다· 그 속에 소무상의 모습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진무원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유난히도 청명하고 깨끗해 보이는 하늘이다· 구름 한 점 없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평원 너머가 보일 정도였다· 평소라면 기분 좋게 웃을 터였지만 진무원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북방의 겨울이 이렇게 시작된다는 것을· 이제 곧 기온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살을 엘 듯한 거친 바람이 불어오리라· 그렇게 시작된 겨울은 북방의 평원을 온통 백색의 세상으로 만들 것이다·
“아 씨발! 졸라 춥네· 거기 물건 어서 안으로 들여가·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하고 부족한 거는 어서 보충 신청해·”
장패산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진무원의 고막을 자극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장패산이 짐이 산더미처럼 쌓인 수레를 앞에 두고 삼조원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진무원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작년 겨울의 추위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진무원 역시 그 어떤 겨울보다 혹독했던 추위에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그러니 생전 처음 북방의 겨울을 경험한 삼조원들은 어떠했겠는가?
문틈을 파고드는 칼날 같은 바람과 숨결마저 얼리는 혹한에 하나같이 동상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더군다나 식량의 양의 잘못 계산해 한겨울에 배를 곯아야 했으니 이번 겨울을 맞이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울이 닥치기 한 달 전부터 장패산은 운중천에 서신을 보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식량과 각종 보급품의 양을 두 배로 늘려줄 것을 요청한 것도 모자라 인근 마을에서 사냥꾼들이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사들여 서툰 솜씨로나마 옷을 만들어 혹한에 단단히 대비했다·
진무원과 장패산 등의 불편한 동거는 그렇게 두 번째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들 간의 관계는 변한 것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며 지난 세월을 보낸 것이다· 마치 소가 닭 보듯이 그렇게·
일 년 동안 진무원의 키는 한 뼘이나 자랐고 마른 몸에도 약간의 근육이 붙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고집스럽게 악다문 입술과 한층 깊어진 눈매였다· 그 때문에 이제 겨우 열여섯 살 소년이라고 보기 힘든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소무상은 그런 진무원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예전보다 누그러졌지만 진무원을 바라보는 소무상의 시선에는 아직도 옅은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진무원도 소무상의 시선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처음 왔을 때보다는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패산이나 다른 조원 대부분이 허송세월하는 데 반해 무슨 이유에선지 소무상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매일같이 그가 진각을 밟고 검을 휘두르는 통에 후원의 풀은 씨가 말랐고 바닥은 돌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지금 소무상은 청운검법으로 익힐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승의 경지로 가는 길목은 막혀 있었고 그 때문에 어느 때보다 초조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공자님!”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진무원을 불렀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삼십 대 후반임에도 또래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과 검은 피부의 남자가 큰 짐수레를 끌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황숙!”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공자님?”
반가운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바로 황철이었다· 그가 진무원이 겨울을 보낼 물건들을 수레에 가득 싣고 다시 찾아온 것이다·
“염려 덕분에 보다시피· 그보다 황숙은 어떻게 지냈나요?”
진무원이 황철이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며 물었다· 그러자 황철이 미소를 지었다·
“보다시피 이렇게 건강합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황철이 진무원의 등을 떠밀다시피 했다·
진무원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황철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진무원이 황철이 끌고 온 수레를 바라보았다· 수레 위에는 진무원이 올 겨울을 날 양식과 각종 물건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동안 보표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사온 것들이다·
황철의 지극정성에 진무원은 콧날이 시큰해져 옴을 느꼈다·
“황숙 이렇게 안 해도 된다니까요·”
“제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공자님은 이보다 더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고귀한 분이신데····”
황철이 눈물을 내비치자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황숙· 그러니까 가슴 아파할 필요 없어요·”
황철이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북천문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백여 년 전 밀야의 침공 때 중원은 멸망 직전에 이르렀고 아직도 그 상처가 다 치유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하고 인심은 덧없었다· 예전의 성세를 회복한 중원은 벌써 그날의 상처와 공포를 잊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벌써 북천문을 잊었다· 그리고 진무원 역시 잊힌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방으로 들어오자 진무원이 가장 먼저 궁금한 것을 물었다· 황철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며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황철은 진무원이 세상과 교감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황철을 통해 그는 중원의 사정을 파악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했다· 황철도 그런 진무원의 마음을 알기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성심성의껏 이야기했다·
황철의 이야기는 밤새 계속되었고 간간이 진무원의 웃음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아침이 되자 황철이 정성껏 차린 음식을 진무원에게 내왔다· 진무원이 황철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진무원은 황철이 해온 음식을 모두 먹었다· 그제야 황철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자님 물건들은 모두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꼭 끼니 거르지 마시고 챙겨 드십시오·”
“걱정 마세요· 이래 봬도 하루 세 끼 꼭 챙겨 먹으니까요·”
진무원의 대답에도 황철은 안심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진무원은 그런 황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아마 자신이었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때 진무원의 시선이 황철이 가져온 짐수레에 향했다· 싣고 온 물건을 모두 내리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물건이 있었던 것이다·
“저건?”
어린아이 몸통만 한 돌덩이였다· 칙칙한 검은 빛이 감도는 것이 보기에도 묵직해 보였다·
“이번 표행 길에 운남에 갔다가 구한 겁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돌이라 하여 한 부족이 신성시 모시던 것인데····”
“그런 물건을 숙부가 어떻게?”
“그 부족이 몰살을 당해서 주인 없는 물건이 되었더군요·”
“몰살?”
“패권회(覇拳會)와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더군요·”
“····”
진무원이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슴푸레 새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가 없었다·
“패권회가 운남에 자리를 잡은 겁니까?”
“아무래도 견제하는 문파가 적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황철의 대답에 진무원이 눈을 감았다·
북천문을 배반하고 갈라져 나간 북천사주는 중원에 각자의 무력 단체를 만들었다·
소수귀검(素手鬼劍) 연천화가 만든 중검보(重劍堡)는 중원의 서쪽에 자리를 잡아 달리 서천보(西天堡)라고 불렸다·
풍운산장(風雲山莊)은 마찬가지로 북천사주의 일인이었던 풍제(風帝) 경무생이 만든 단체였다· 풍제 경무생은 보법과 각법에 능했는데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모이다 보니 강맹한 각법이 주축 무공이 되었다·
북천사주 중 가장 강한 무력을 갖춘 것으로 추측되는 철혈무제(鐵血武帝) 제혁심은 중원의 북쪽에 철혈성(鐵血城)을 세웠다· 제혁심은 특히 강기 무공에 능했는데 성격이 패도적이어서 모두가 두려워했다·
북천사주의 마지막 인물은 바로 조천우였다· 조천우는 권마(拳魔)라는 칭호로 불렸는데 타고난 무광인데다가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단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절대로 뒤돌아보는 법이 없어 한 마리 성난 곰 같았다·
패권회는 중원 여타 문파의 견제를 피해 운남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중소 부족이 멸망하거나 패권회에 흡수를 당했다·
“아닙니다· 공자님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제가 다시 가져가면 됩니다·”
“아니에요· 왠지 마음이 쓰여서 그럽니다·”
진무원이 손끝으로 돌을 어루만졌다· 시리도록 차가운 감촉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